집합과 개념의 자기 순환적 근거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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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역설: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은 존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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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예의 타인이 무려 <통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지레 짐작한 후 이를 고정하곤 다시 이를 전제로 이를 포기하도록 <통제>하기 위한 <욕구>를 가진, <통제 욕구>에 대한 비난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통제 욕구>의 발현인 까닭에, 그리 그가 타인에게서 발견한 <통제 욕구>는 기실 자기 자신으로부터 <투사>된 요소일 수밖엔 없다. 그는 사실상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셈이며, 이를 견딜 수 없어 여느 허수아비들을 찾아 대리 공격하며 해소하고 있는 모양인데, 바로 그것이 <투사Projection>의 작동 양상의 전형 아니던가.
예의 투사적 역설은 일상의 도처에 발견된다. 혹자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반성 없는 대사들이 어찌나 자랑스럽게 발설되는지. 또 다른 보다 직설적인 오류도 있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적개심 위에 서서는, 스스로 지금 우습다고, 비웃고 있는 중이라고 자기 암시를 걸기도 하는 것이다.
요컨대 스스로 현재 비난하는 대상(예컨대 예의 통제 욕구를 가지고 있거나 반성을 하고 있지 않은 대상)이 시초부터 이미 자기 자신이거나,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내린 정의에 스스로 위배(분노한 표정으로 나는 우스워하고 있다고 자기 암시를 거는 양상)하는 증상(인지부조화)은 마치 <개념의 자기 순환적 근거 짓기>에 실패한 증거인 양 보이지 않던가.
하나의 개념은 자기 자신부터 정의 내리며 순환적 근거 짓기를 시도한다. 가령 자기 자신이 웃고 있다고 선언하려면, 실제로 웃고 있어야 한다. 반성을 종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스스로 반성을 해봤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제 욕구를 비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통제 욕구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타인의 통제 욕구를 멈추고자 한다는 통제 욕구가 그 자신에게 없다면, 타인의 통제 욕구에 대한 비난이 등장할 수가 없다.
이런 역설에서 탈출하려면 스스로 예외가 되는 방법뿐이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권력을 쥐는 방법뿐이다. 이런 <나는 통제해도 되는 사람이고 너는 안 된다>와 같은 주장은, 같은 우물에서 물을 퍼오지 않는다. 계급론의 전제라고나 할까. 일종의 선민의식이다. 물론 누구의 자아든 속히 비대해지기 위해 근거를 찾고자 할 수야 있다. 남과 다른 나를 근거 짓기 위해, 자기 말의 대상에서 자기 자신만 예외 처리하는 것이다.
예컨대 비속어라는 기호의 역설도 거기 있다. 비속어라는 기호 자체는 표준어지만, 그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은 표준어가 아니다. 비속어라는 단어는 비속어가 아니다. 따라서 <개념의 자기 순환적 근거 짓기>에 실패한다. 이 역설은, 표준어와 비속어를 구분하는 것이 <권력>인 까닭에 정당화된다.
그러나, 어떤 <권력>이 지껄이건, <우선> 1+1은 2다. 표준어고 비속어건 간에, 언어는 정의되기에 앞서 사용된다. 언어의 <사용>이 비속어와 표준어를 구분하는 <정의>에 앞선다. <삶>이 <사명>에 앞서고,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바와 같이.
소위 <사용>이 그 뿌리에 없는 얼마나 많은 표준어의 <정의>들이 아무도 모르는 무덤에서 <필연적인> 부패를 기다리고 있겠는가. <실존>이 없는 <본질>이나 <삶> 없는 <사명>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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