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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집합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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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정의’하는 명제는, 해당 정의를 통한 ‘집합’을 낳는다. 가령 가로등의 ‘정의’는 가로등이라는 ‘집합’을 우리가 지칭(사용)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호는, 정의된 집합들이라 할 수 있으리라.


또 어떤 ‘정의’는 다른 ‘정의’에 의탁하기도 한다. 하나의 ‘정의’를 제외한 나머지를 ‘정의’ 내리는 것, 말하자면 광기는 이성의 부재로 ‘정의’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종 여집합의 정의를 문제 삼게 되기도 한다.


집합의 정의에서, 특정 집합을 제외하는 방식으로 여집합 자체의 정의가 정의될 수 있다기엔 이미 여기 이 여집합의 ‘정의’가 그 자체 집합의 정의가 아니거니와. 특히 예의 집합이 표현 방식에 관한 것이라면, 이를테면 한국에서 사용하는 언어 내의 한국어의 여집합을 정의할 때, 그 자체 표현 양식을 한국어로 정의하는 자체 오류가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른바 비속어라는 표준 국어의 발음조차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는 별도로 스스로는 비속어가 아니게 되는 셈이므로. 따라서 비속어는 그 자체로 비속어가 아닌 까닭에, 우리가 <정의>하는 방식으론 여집합이라는 집합 자체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광기에서조차 이성의 여집합으로서의 정의는 광기가 내린 정의라기보단 이성이 내린 정의일 테고.


이처럼 한쪽의 언어로만 둘을 다 설명할 수밖에 없는 문제에 관하여, 물론 이를 <권력>이나 <카르텔>의 문제로 퉁 쳐서 생각하기 편리하게 환원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거나 여기 도래하는 문제는 그보단 현실에서 마주하는 작동 양상의 문제일 텐데. 그리하여 끝끝내 이 여집합의 정의(정체성/존재론/본질)에 <우선> 천착하고자 한다면 이 문제는 영영 해결될 수 없지 않겠는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여집합이면서, 바로 그 여집합의 여집합인 처음 예의 집합이 표현 수단이기도 한 경우, 여집합을 자체 정의하기보단 집합과 여집합을 구분하는 경계를 정의하는 데 이르러야, 그러니까 집합과 여집합을 동시에 [정의]해야 집합만큼이나 여집합의 [사용]에도 <비로소> 이를 수 있지 않겠는지.


이것이 푸코가, 자신의 [광기의 역사]가 광기 아닌 이성으로 작성되었다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광기의 정의에 천착하는 게 아닌, 광기와 이성의 경계에 천착했던 이유 아니겠나. 그리하여 이는, 다분히 말 그대로의 그저 [광기의 역사]라기보다, [이성이 그 경계에서 광기를 어떻게 병탄해 나갔는지의 역사에의 고발]인 셈 아니겠는지.


무언가 정의하는 실천이 낳은 집합-기호(여기서의 집합-기호는 대상을 지칭(사용)하기 위한 도구다)는, 그리고 그 기호의 <설명서>는 기호의 유래가 아니라 기호가 언제 어떻게 사용되는지 설명(정의)한다.


허나, 여느 도구의 원리부터 사용법까지 이어 설명하는 설명서에 명기된 실천 방안은 해당 도구의 창조자가, 그러니까 설명서의 작성자가 무얼 <의도>했는지 따위만 보여줄 뿐, 진정 해당 도구가 현실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는 별도로 연구되어야 하지 않겠나. 이른바 <사용성>은 바로 그 도구가 현실과의 경계에서 어떻게 그 현실에 응용되어 유용하게 병합되어 가는지를 알려줄 텐데.


바로 그런 까닭에, 만에 하나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더라도 그리 창조한 신의 <의도>로부터 창조된 인간의 <삶>은 분리되(어야 하)는 모양이다. 언제고 도구는 <설명서>로부터 분리되어 <사용>되곤 하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언제고 어디서나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모양이고. 애초에 무어라 정의했건 마침내 어떻게 사용하는지, 바로 그 <사용성>이 관건이겠으므로.


이를테면, 예의 사용성을 논박하기 위해 정의해 구성한 설치미술작품이 설령 어딘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조차 실상은 사용성을 논박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바로 그 <사용성>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는, 예의 <정의한다> 혹은 <열어 밝힌다>는 등의 서술어가 대상 삼는 실천 따위조차도 어떤 <사용>의 일환이 아니던가. 그 <사용>이 언어의 사용이든, 행위의 사용이든.


그러므로 문제는 언제나 본질(존재론/정체성) 따위가 아니라 실존이고, 사명 따위가 아니라 삶이며, 창조 따위가 아니라 사용인 것이다. 사용이 그 뿌리에 없는 수많은 자칭 발명품은 이미 아무도 모르는 무덤에서 <필연적인> 부패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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