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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약이든, 책임을 질 시점이 다가오면 갈등이 일어나고는 한다. 예컨대 계약대로 진행하지 못했다거나, 또는 계약 자체가 처음부터 매우 부당했고 상황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체결했으니 가해자는 상대방이라는 식이다.
때때로 게임의 규칙에 대해 생각한다.
고대에는 폭력이었을 것이다. 가령 으스대는 길거리 양아치들을 보면, 고대에는 저런 이들의 자리가 더 없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자식의 학업에 애쓰는 엘리트 바라기들 만큼이나, 저 고대에는 무수한 엘리트들이 바로 그 ‘폭력’을 독점하기 위해 ‘노력’했을 테니까. 소위 ‘노력’에서 탈락한 이들의 흔한 시시비비엔 그런 원시적 전문성조차 없겠으므로. 원시적 폭력이 체계적으로 가공되어 저 모든 엘리트들이 소위 책사로라도 그 힘을 독점한 자리에, 스스로 가공하는데 영영 실패하여 격렬한 ‘응석’ 따위나 부리는 저 양아치들이 찍 소리라도 낼 수 있었을는지. 아마 곧장 살해되지나 않았으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응석이 충분한 가공과 함께했을 때, 그러니까 충분한 노력이 더해진 응석의 경우 제아무리 그게 미개하더라도, 그러니까 삶의 목적이 오직 자기 욕동의 배설에만 몰두되어 있는 인간이 선망받는 건 오랜 역사를 가지긴 할 텐데. 호르몬을 배설하고 권력을 남용하기 위해 독재자의 자리에 오른 저 독재자를 선망하는 이들이 종종 진정 선망하는 게 예의 독재자의 능력이 아니라 저기 저 배설과 남용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적에. 그러니까, 리더십이나 카리스마로 번역되는, 배설하고자 하는 이들이 선망하곤 하는 배설의 양태들을 고려할 적에. 그처럼 선망받는 만끽된 응석을 고려할 적에. 그처럼 명실상부하게 배설 그 자체를, 전혀 가공되지도 노력하지도 스스로 자성하지도 않는, 그러니까 완전히 검열 없이 배설에만 몰두하는 원시인들이 저 배설 자체를 그것이 배설 자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선망하는지 잘 보여주지 않던가. 이른바, [누구나 그렇지 않더냐]는 미개한 정당화로 스스로 겨우겨우 추동질하면서.
말하자면, 이는 (원시적) 힘에의 숭상 아니던가. 분명 이런 미개함보다는 감시와 처벌로 이루어진 ‘규율’의 통치가 훨씬 고도화된 사회가 아니겠나. 그리고 오늘의 권력은 예의 ‘규율’을 매개 삼아 또 다른 향방으로 밀집하는 양 보인다.
어떤 계약이든, 책임을 질 시점이 다가오면 갈등이 일어나고는 한다. 예컨대 계약대로 진행하지 못했다거나, 또는 계약 자체가 처음부터 매우 부당했고 상황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체결했으니 가해자는 상대방이라는 식이다. 그렇다. 가해자. 가해자를 지목함으로써, 스스로 피해자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다. 폭력의 가해자는 폭력을 독점한 정부의 규율에 의해 대리 처벌된다. 그러므로 규율을 움직이려면 규율에 호소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욕동을 배설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독재자가 없다면, 그 결정은 일종의 사법기관과 배심원에게로, 또 간혹은 ‘군중’에게로 옮겨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법기관 밖에 선 그는 ‘규율’에 호소하기 위해 <우선> ‘군중’에게 <관심>을 호소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군중이 제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그들이 그리 쉽사리 ‘법’을 교정할 순 없다. 그저 비난 어린 댓글 따위로 누군가를 자살로 몰아넣을지언정. 그처럼 독재자의 배설을 선망하는 미개인으로서 자기 욕동을 배설하는 창구가 된 댓글 창으로는, 아직까지 정석적인 ‘입법’은 어려울 터다. 일반적으로 계약 그 자체가 부당하다면 더욱 상위 계약으로 호소할 수 있다. 말하자면 ‘법’에 저촉되는 계약은 무효인 것이다. 그러한 법은 가해자를 처벌하지만, 피해자를 생산하기도 한다. 공식적인 피해자는 ‘명분’이 있다. 그리고 ‘명분’은 때때로 권력이다. 물론 법은 피해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하고, 얼마간의 권력을 ‘당연히’ 쥐여 주어야 할 터다.
그러나 피해자가 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해졌다.
법의 측면에서 이 ‘노력’은 부당하다. 어째서 피해자가 노력까지 해야 하는가? 어디 가해자를 자동으로 찢어발기는 법 없나? 차라리 AI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나? 뭐 이런.
그러나 사회의 틀을 으깨버리는 불법과 처벌까지 가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피해자와 피해자 코스프레를 구분해 본다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책임을 질 시점에 다다른 일반적인 계약 관계에서는 코스프레의 대결이 약동하고는 한다. 예의 ‘명분’을 얻고자 피해자에 스스로를 비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억울하고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만이 이 관계에서 오직 ‘무고’하다는 걸 증명하고자 노력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과연 누가 누가 더 무고한가! 규율의 사회에서 폭력은 규율의 폭력 외엔 모조리 불법적이겠으니, 오직 규율을 자기편으로 삼는 것이 고지를 점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겠으므로. 그리 규율에 호소하며 규율의 폭력을 빌려 상대를 처벌하기 위해선 스스로 ‘더’ ‘무고’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기업과 기업이 일하면서 얼마나 많은 메일들이 그 ‘무고’하기 위한 ‘증적’으로 쌓이는지. 기업이 커갈수록 얼마나 많은 임원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저 ‘증적’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증적’도 쌓지 않고 일하기 위해, 책임자 없는 프로젝트가 얼마나 양산되어 표류 중인지.
미개한 원시 사회에서 자신을 폭력으로 조차 가공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일종의 부적응이라면, 규율의 사회에서 스스로를 ‘무고’하게 위치시키려는 <노력>을 할 줄 모르는 것 또한 일종의 부적응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미개인이 폭력을 독점하며 권력을 남용하여 욕동을 배설하고자 하는 바와 다를 바 없는, 일종의 배설을 위해서 아니던가. 그러니까, 스스로를 무고하게 위치시켜 명분을 휘두르며 쏟아내는 배설을 위해, 심지어는 그처럼 ‘무해’한 인간형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키기 위해 얼마나 은연중에 우리는 ‘노력’하고 있는가? 물론 그러한 적응에 더욱 실패하여, 아무런 노력도 없이 스스로의 ‘무해’함을 정체성으로 삼으며 <어른스러운 표정>에만 지탱해 살아가는 희한한 자칭 희생양들도 즐겨 발견되곤 할 터다.
말하자면, 일상에서 무고하고 무해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지. 증적도 노력도 없이 스스로 무고하고 무해하다 자칭하려는 얼빠진 호소인들도 어렵지 않게 목도하곤 하겠으니. 허나, 굳이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조차 늘 커다란 노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지.
그리하여 기실 스스로 무해하다고 위치시키며 살고 싶든, 아니면 권력과 명분을 독점해서 욕동을 배설하며 남용하며 살고 싶든, 기실 <동일한> 둘 중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든, 그처럼 어떤 자아상의 이미지를 욕망하든, 결국 그건 자기 자신을 바로 그런 이미지로 보아달라고 ‘군중’에게 싹싹 빌며 호소하다 지쳐 사실은 강요하고 싶은 저런 획일적이고 흔한 양태이지 않겠는지. 그러므로 거기 ‘자아상(존재론)’이라는 구강기 배설의 출구가 어떤 냄새를 풍기며 자리하든, 다만 때마다의 할 일을 하면 그만인 게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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