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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학자의 말을 인용하더라도, 인용된 글귀를 처음부터 연역할 수 있어야만 저자는 글귀를 이해하고 ‘사용’한 셈이다. 이 경우에 저자는 바로 이 ‘인용’을 통해 지면을 절약할 따름이다. 그리고 오직 이 경우에만 ‘인용’은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에 대한 인용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인용은 로고스를 향한다.
만일 인용의 목적이, 위에서처럼 그저 스스로 연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절약하려는 게 아니라, 인용된 글의 작성자의 권위를 빌려오는 데 있다면, 그러니까, 그 주의점이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에 있다면, 그 인용은 ‘에토스’를 향할 뿐이다.
문제는 권위(에토스)와 내용(로고스)의 충돌 정도가 아니다. 차라리 ‘충돌’이라면 구분이라도 되지 않겠나. 허나, 어찌나 자주 그 둘의 <혼미한> 혼동이 목도되곤 하는지.
이를테면 ‘정보’는 ‘지식’이 아니고, 아카데미아는, 그러니까 ‘학위 취득’은 ‘지성’ 자체일 리 없듯, ‘철학 교수’는 ‘철학자’가 아니며, 지식 소매상은 지성인이 아니고, ‘교육자’는 ‘연구자’가 아니고, ‘연구자’는 <위대한> ‘위인’이 <전혀> 아닌 것이다. 물론, 도대체 ‘사람’이라는 명사 따위 앞에 도무지 어떻게 ‘위대한’이라는 형용사가 올 수 있는지. 그 형용사는 오직 ‘내용’이나 ‘업적’, 혹은 ‘행위’ 정도의 일시적 정당성만을 가지지 않겠는지.
기실, 제도라는 ‘에토스’, 그러니까 소위 아카데미아는 바로 이 연역의 내용들 위에서 오롯이 ‘사파’이며, 소위 ‘권위’를 ‘내용(로고스)’과 혼미하게 혼동하는 양태야말로 ‘반지성주의’의 전형일 텐데.
그러므로 인용에 대하여 저자는 인용된 글귀를 모조리 처음부터 연역할 수 있는가? 혹 아주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납득할 정도로 아귀는 맞출 수 있는가? 방어적 중언부언 없이, 그러니까, 설령 다소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소위 ‘파롤’과 ‘랑그’를 <혼미하게> 혼동하지 않으면서 인용된 글귀를 처음부터 연역해 낼 수 있다면, 이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이상으로 <다른 지식을 예의 지식에 비롯하여 연역>해볼 수도 있으리라. 다른 말로, 연구해 볼 수도 있으리라.
할 수 있는 자는 행하지만, 할 수 없는 자는 가르친다고 했던 혹자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다음 자명성은 익숙한 자명성 위에서 바로 그에 의거하여 성립되는 모양이니. 그의 인용에 인용된 ‘로고스’의 저자 이름이 노골적으로 언급되어 사실상 ‘에토스’가 그리 덕지덕지 칠해진다면, 스스로 떼를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바 또한 꼴불견이리라.
그러니까, 우리 아빠가 더 강해! 라는 말 외에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그 내용이라는 호소에 그의 출신 성분이나 출신 기관이나 학교,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 혹은 그가 어떤 철학자의 계보를 자인하는지, 기타 여러 권위들 등과 같이, 연역과 상관없는 게 듬뿍 담겨 있다면 그는 ‘사파’ 아니겠나. 어쨌든 확실한 건, ‘유효성’도 없고 ‘철학’도 아니란 점에서 ‘정파’는 아닌 셈이다.
차라리 첨단의 기술이 더 ‘철학’인 것은, 그것이 가르치기보다 행하는 걸 선택한 까닭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작동’으로서 늘 그 ‘유효성’을 증명하는 까닭이다. ‘에토스’ 더미보다야 작동하는 ‘로고스’ 한 조각이 언제나 ‘더’ 철학이다. 심지어 그것은 ‘철학 교수’도 ‘철학도’도 ‘철학 학위 연구자’도 아니니 얼마나 ‘더’ ‘철학’이란 말인가. ‘작동’은 그 원리를 어떤 ‘도서관’에서 취했든 ‘작동’ 그 자체로 ‘인용’의 ‘책임’을 질 수밖에 없으니.
소위 ‘에토스’가 온갖 권위를 이용해서 스스로 철학이라고 ‘호소’하는 양태보다야, ‘로고스’가 자기 자신의 작동을 통해 수행하는 스스로의 유효성에의 ‘증명’은, 그것이 어떤 소박한 기술을 포함하더라도, 그리고 그 기술을 넘어서서 어떤 영감을 가져오더라도, 그리하여 끝내 그것이 그 무슨 형이상학에 도달하더라도, 그러니까 ‘증명’은 ‘호소’보다 언제나 ‘더’ 설득력 있으며 또 그래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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