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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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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긍정
2.인물평
3.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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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긍정
굳이 ‘니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긍정’은 우리 인식의 기본 속성이다.
이를테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자고 아무리 다짐해도 그 다짐의 순간 코끼리부터 생각하고 보는 것이다. 혹자가 ‘열등감’을 느끼는데, 본인이 느끼는 이 ‘열등감’이 가려지게 하기 위해 남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를 찾고자 하는 저 유명한 투사Projection로서의 방어 기제만 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스스로의 ‘열등감’을 이미 ‘긍정’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런 까닭에 방어 기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삶은 투사의 증상으로 ‘상상’된 정도 따위가 아닌, 현실에 있는 바로 그 삶이다.
그러므로 삶에의 긍정은 이런 식으로도 진행될 수 있다. ‘열등한 나도 나다.’
나아가, 누구든 손쉽게 자기 자신을 자인하고자 하는 자아상에 걸맞은 자신을 ‘긍정’하기는 쉽다. 그러므로 그 쉬운 걸 굳이 긍정하려는 별도의 노력은 그 필요가 덜하다. 여기서 긍정의 대상이 되는 삶은 오직 긍정하기 힘든 삶이겠으니, 소위 ‘자아상’에서 벗어나는 바로 그 삶만이 긍정의 대상인 것이다. 우리가 자인하는 존재로 복귀하는 게 <전혀> 아닌, 그 존재에서 벗어난,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이고자 하는 바로 그 호르몬에 부푼 자아상에서 벗어난 저 당혹스러운 삶을 ‘우선’ ‘긍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회귀란 이 삶이 제아무리 무한히 반복된다손 치더라도 ‘긍정’해야 한다는 데 이른다. 그러니까, 무한히 반복했을 때, 도무지 반복되어 돌아온 삶에서 가장 긍정하기 힘들고 인정하기 힘든 바로 그것을 긍정해야 한다는 데 다다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예의 ‘긍정’의 대상이 ‘삶’인 까닭이다.
그에 대해 만약 혹자가 저 ‘긍정’은 납득하지만, ‘영원회귀’란 삶의 지양이고 그래서 도피라고 지껄인다면, 이는 사실상 예의 ‘긍정’의 과녁이 ‘삶’이 아니라고 전제하며 또 삶 대신 어떤 성취(가령, 자기 자아상에 걸맞은 인기인이 되는 것 등등)가 그에 앞서 있다고 전제하는 셈이다. 고로 그가 이해하지 못한 건 그저 ‘영원회귀’뿐 아니라 ‘긍정’이기도 한 셈이다. 고로 여기 이 연역의 사슬이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뿌리부터 자인하는 셈인바, 그는 니체의 ‘긍정’이나 ‘영원회귀’를 ‘이해’하여 자기 ‘연구(연역)’에 ‘사용’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다만 ‘니체’에 대한 인물평을 하고 싶은 데 불과하다.
어째서?
굳이 살피자면, ‘니체’에게 열등감을 얼마나 느낀 건지, 혹은 ‘니체’한테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던 누군가를 어떻게 투사한 건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터다. 요는 ‘긍정’이나 ‘영원회귀’가 인물평을 위해 소비되었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요는, ‘메시지’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메신저’에 대한 비방의 제물로 삼은 이 ‘습관’적 ‘투사’라는 ‘방어 기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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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물평
가령, 발명가의 작품이 발명품이라면, 사상가의 작품은 ‘개념’일 텐데. 도대체가, 바퀴를 발명한 자가 자기가 발명한 바퀴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를 굳이 전기, 중기, 후기를 나누어 살필 까닭이 무엇일는지. 누군가, 저 최초의 바퀴를 참조하여 자기 바퀴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원리만 가져오면 될 일이다.
혹자가 여느 사상가의 ‘개념’을 ‘사용’해 자기 연역을 이어가고자 한다면, 그저 그 ‘개념’을 ‘이해’하면 될 일이다. 그리 인용된 사상가의 인물평까지 갈 필요가 없을 텐데. 무슨,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이 시기에 따라 어떻게 변모했는지는 ‘개념’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 그저 ‘개인사’에 대한 접근일 뿐이고, 그러한 ‘개인사’가 필요한 작업은 그가 만들어 낸 ‘개념’을 ‘사용’하는 작업이 아니라 당사자의 작품을 번역하거나 그 개인사를 하나의 역사로서 집필하는 작업 정도일 텐데.
그러니까, 무슨 사상가가 어떤 개념을 어느 시기에 어떤 맥락으로 사용했는지 암기하는 일이 도대체 그 개념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작업과 얼마나 긴밀할는지. 개념을 이해하는 일과 개념의 창안자에 대한 인물평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으나, 예컨대 덧셈을 발명한 사람이 자기 인생의 시기마다 ‘덧셈’을 어떤 마음과 맥락으로 사용했는지 알게 되면 ‘덧셈’을 더 잘 이해하게 될는지를 보자면 그저 의심스럽다.
개념을 사용하여 연역하는 게 아니라, 다만 특정 사상가가 어떤 개념을 어떤 뉘앙스로 쓰고 어떤 성격이었으며 그래서 다른 사상가와 어떤 마찰이 있는지는, 그게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 개념 그 자체의 이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 심지어는, 그 사상가가 자기 자신의 개념을 시기 별로 어떤 맥락에서 사용했든 간에, 그러니까 그 디테일한 뉘앙스를 얼마나 잘 알든 간에, 사용자는 그 개념을 그저 자기 ‘연역’에 ‘사용’할 만큼 ‘이해’하면 그뿐이지 않나.
그 사상가가 작성한 글을 더욱 잘 ‘이해’하게 돕기 위해, 그러니까 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연역’을 하는데 왜 매번 그 사상가의 구체적인 맥락이 필요한가. 왜 그 사상가가 그 개념을 어디서 떠올렸는지가 필요한가. 덧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덧셈에의 발명가와 아무 상관 없이, <독립적인> ‘개념’으로서의 덧셈 자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학위를 얻기 위해 인물평을 해야 하고, 인물의 개인사를 당 인물이 만들어낸 사상과 연관시켜야 하며, 그 사상과 개념의 정확도를 바로 그 인물의 삶과 작성한 작품의 한계 내에서만 소위 <진지하고 엄밀하게> 간추려야 한다면, 그건 이미 그 인물이 만든 개념일 리 없다. 왜냐하면 개념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개념이 개념의 저자와 따로 떨어지면 이해할 수 없을 수가 있나. 가령 덧셈이라는 개념은 이해해도 덧셈의 발명가를 모르는 경우가 어찌나 ‘당연한가’ 말이다. 만일 거꾸로 덧셈의 발명가는 아는데 덧셈은 모른다면 그건 그냥 누군가 개인에 대해 들은 적 있을 뿐인 것이다. 물론, ‘개념’에의 ‘이해’와는 <전혀>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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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념
다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자고 아무리 다짐해도 그 다짐의 순간 코끼리부터 생각하고 보는 것이다. 혹자가 ‘열등감’을 느끼는데, 본인이 느끼는 이 ‘열등감’이 가려지게 하기 위해 남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를 찾고자 하는 저 유명한 투사로서의 방어 기제만 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스스로의 ‘열등감’을 이미 ‘긍정’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런 까닭에 방어 기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삶은 투사의 증상으로 ‘상상’된 정도 따위가 아닌, 현실에 있는 바로 그 삶이다.
그가 자기 ‘삶’을 도저히 자기 ‘자아상’에 비추어 인정할 수 없어 병리적인 방어 기제를 펼치게 되는 모양으로, 혹자가 또한 도무지 여느 사상가의 ‘개념’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그 사상가의 개인적 맥락에 바로 그 ‘개념’을 엮는 양태가 어찌나 자주 목격되는지.
이를테면, 과연 이러한 인물평이자 개인사에 2차 텍스트라는 지위조차 가당키나 한지. 그리고 바로 그런 평전에 개념으로 호소되곤 하는 단어들이 엮여 있는 담론에서, 누가 무슨 개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가 바야흐로 자랑스럽고 ‘진지한’ ‘담론’으로 나부끼곤 하는가 보다.
가령, ‘덧셈’이든 ‘더하기’든 언어의 외관이 그 개념적 의미와 무슨 상관인지. 그걸 ‘배치’라 부르든, ‘반복’이라 부르든, 심지어 스스로 표현하려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없어 새로 만들어서 사용한다는 저기 저 ‘현존재’ 등의 <파롤>은 무슨 결핍에서 비롯되었길래 그리도 적극적으로 <랑그>와 혼동하여 자랑스럽게 사용하곤 하였다는지. 그래서 ‘긍정’이, ‘영원회귀’가 뭐 어쨌다는 건지. 단어에 맥락만 누적해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모양인데도, 개념도 의미도 아닌 단어의 외관에 거듭 다시 온 신경을 집중하는 양상들을 보면 그가 방금 무슨 책을 읽고 열에 들떠 사용 중인지 그토록 선전되어, 굳이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는 경우가 어찌나 자주일는지.
그러니까, 그가 실존과 실존론을 구분하며 자랑스러운 엄밀함을 과시하며 우쭐대는지, 혹 ‘타자’를 남발하는지 도래를 남발하는지 학자의 이름(가령 헤겔, 칸트 등)을 남발하는지 등으로, 그는 이제 사상가의 사상은 모르더라도 예의 사상가가 사용하는 ‘어휘’의 외관을 닮고 싶거나 공격하고 싶어 박차를 가하는 중인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 그에게 저 사상가는 사상의 주창자도 개념의 발명가도 아니라 ‘어휘’의 연금술사가 되는 셈인바. 예의 ‘인물평’과 개념을 혼동하는 독자인 그의 뇌리에 바로 이 상상 속 ‘연금술사’가 처음으로 새겨넣는 ‘어휘’는, 독자와 연금술사 둘 다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사상가들이라는 <혼미한> ‘공감’의 외관을 가진 단어들이리라.
독자는 그저 읽기만 하는데도 스스로 어찌나 자랑스럽겠는가. 예의 개념이 제거된 ‘어휘’로 스스로 품던 의미를 투사해서, 나만 생각하던 게 아니라 저기 저 사상가도 그리 생각했다고 여기며, 그와 나는 동급이야! 하며, 나는 이미 진리를 알고있었어! 하며, 이 정합성이란! 하며 그리 뿌듯한 스스로의 ‘자칭’ ‘천재성’에 저토록 경탄하지 않겠는지.
그렇게 보면, 학위의 (그토록의) 핫이슈(주제)가 ‘인물’인 것이 처음부터 어찌나 당황스러운 현상이란 말인가(그 부작용으로서 어떤 사상가가 다른 사상가의 개념을 빌려 사용했는데 그 공의 인정을 안 해줬느니 해줬느니 하는 이상한 다툼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사상가들에 대한 인물평을 넘어 인기 대결에 이르는 양. 그러니까, ‘마치 우리 아빠가 더 위대해’ 외치며 다투며 ‘누가 누가 더 핫이슈인지’를 놓고 떼를 쓰는 양으로).
누군가 개념을 발명했다면, 그러니까, 그게 개념이 맞다면, 그 개념은 그걸 발명한 자의 개인사뿐 아니라 그가 그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 혹은 그가 그걸 바라보는 태도 또는 그가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와 아무 상관이 없어야 ‘개념’인 것이다. 누가 ‘우정’이라는 개념을, 또 누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는지, 혹은 최소한 그 ‘개념’들을 우리 각자에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누군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그 ‘개념’을 사용해서 문장을 구성하고 또 말을 하고, 심지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바로 그 개념들과 맞닥뜨리는지 감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최소한 저자 없이도 사용 가능해야 그게 개념이지 않겠는지. 그러니 그렇지 못한 건 개념일 리도, 사상일 리도, 철학일 리도 없다.
말하자면, 그러니까, ‘상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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