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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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해 생각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오래 생각한다면 깨닫는 게 많아지기라도 하나? 혹 그러다가도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는다면, 뭔가 깨닫긴 했던가? 기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사고하는 오류가 아니던가.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는다고 <전혀> 어른스러워질 수 없다. 오래 생각한다고 모르는 게 알아질 리 없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고 다루는 일이 심각해질 리도 없다.

그러므로, 저 모든 건 일일이 다 별도의 기준으로 검토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흔하게는 [투사]라는 방어기제에서도 바로 이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도착적인 사고방식과 그토록 쉬이 마주한다.

저 사람의 잘못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미리 세우고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저 사람의 결점이어야 하고, 저 사람의 실수여야만 한다.

이러한 퇴행의 방편이 일종의 [양자역학]과 만나면서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라 주장될 수도 있다. 관찰 행위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주는 그 주장이 놀라운 건, 일종의 일반성에 충격을 주는 까닭이다. 그러나, 통념에 제아무리 균열을 내고자 하더라도, 바로 그 균열조차 통념에 의존하여 제 주장을 겨우 전달하는 것이다.

가령 이제는, [인지]가 [투사]라는 <혼미한> 주장까지 목도한다. 이는 투사라는 인지적 개념을 투사하여 사용하는 셈이다. 이를테면, 스스로 숨을 쉰다는 것을 [인지]하는 바로 이 인지가 일종의 투사 작용이라면, 그는 스스로 숨을 쉰다는 인지를 하지 않는 동안은 숨을 쉬지 않는 셈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지구 반대편이나 어느 망망대해 어디든 중력에 의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을 '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인식론이나 인지 작용이 그저 투사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중력을 인지하고 있지 않을 때 중력은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 물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셈이다.

이처럼 의도적인 혼미는 정신작용과 물리작용을 혼동하는 양태에서 두드러진다. 혹자는 우리 정신이 <물자체>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던데, 그런들 물자체가 없는 게 되는 게 아니지 않나. 바로 그 물자체가 우리 욕동의 가설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물자체 그 자체의 작동 양상을 탐구하여 그 성질을 조작하고자 하던 세월이 문명의 역사 아니었나 말이다.

투사란 기본적으로 인식에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설명하는 증상 개념 중 하나일 텐데, 이 투사란 개념을 다시 투사하여 인식론이 투사의 일종이라 주장하는 이중 투사에의 증상을 마주할 적이면, 따라서, 전능하다 신격화된 자아상을, 그러니까 자아의 <존재론>에 매몰된 자아상을, 바로 그 가설적 자아상을 아울러 마주하게 되는 셈이라.

물자체에 도달할 수 없어 물자체에 관한 판단이 중지된 것이 물자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닐뿐더러, 심지어는 물자체보다 관찰이 우선하여 바로 그 관찰에 기초하여 물자체가 사후적으로 생성되는 게 <전혀> 아닐 텐데. 이처럼 역전된 도착의 <존재론>이 우선 제거하고자 하는 건 <사물의 존재론>인 것이다.

그가 관찰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그가 인식하지 않아도 마른 나뭇잎에 담뱃불이 옮겨붙으면 산불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처럼 사물들끼리의 상호작용이나 <현상>에조차 그의 인식 여부는 아무 힘이 없다. 인식하든 말든 '작동'한다. 인식은 일어나는 일에 관한 판단이며, 일어날 수도 있는 일에 관한 판단이고, 그러므로 인과관계에 관한 판단이다.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사물들은 존재한다. 물론, 우리 인식 이전의 내적 삶 또한 존재하겠지만, 저기 저 사물들의 존재만큼 외부 영향 아래 <존재>한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인식하기 이전에 <느끼며>, 따라서 세상이 그토록 슬퍼지는 순간에도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 간 상호작용과 같이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상호작용적이며 자족 따윈 없다. 인과관계에 준하는 어떤 감동이나 영감 등이 어딘가로부터 우릴 덮치는 까닭이다.

인과관계를 넓혀 보자면, 인식 이전의 감동이나 영감의 영역일지언정, 그리 아주 희미한 영향일지언정 외부 영향을 반드시 받는다. 그것이 어두운 밤의 별빛이든 새벽 가로등의 슬픔이든 간에.

이토록 방만한 인과론에서조차 우리 인식은 투사로서의 그것이 아니다. 차라리 저 별빛과 가로등에의 투사 상태에 대한 인식은 투사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투사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그가 그렇게 보든 말든 사물들은 <이미> 거기 있을 뿐이었으니.

사물의 존재가 (미리) 거기 있(었)다. '실재'로. 어쩌면 <자아의 존재> 또한 그저 여느 사물에 불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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