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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Feb 23. 2024

32 허구의 과녁

시즌 3 FICTION

소위 ‘가짜 이야기’라는 점에서 허구는 매번 어떤 목적을 ‘달리’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흥부와 놀부에서 과도한 욕심을 악으로 간주하는 서사로써의 권선징악을 들 수 있으리라. 혹 그와 같은 사회적인 교훈 따위가 아니라도, 우리는 그토록 흔하게 (가령)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신화들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던가. 구국의 영웅들의 ‘신화’는, 혹 천년도 전에 이 땅을 살다 간 누군가의 신화는 어떤 ‘선민의식’을 기획하며 구성되지 않았겠나. 설령 그게 얼마간 허구가 아니더라도, 끝끝내 역사 중에서도 허구에서 도용한 바로 그 범주의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래된 것은 예컨대 ‘애국심의 고취’라는 실체 없는 호르몬 작용이 그 필터의 기준 역할을 했던 까닭이 아니던가.

어제의 기억조차 유리하게 와전하여 갈음하고자 하는 관성, 어떻게든 자부심 위에서만 살고자 하는 양태는 언제 어디서나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응석 어린 경향성과 관련 있지 않나. 심리적으로 늘 가상의 관객 앞에 살면서 그 관객들이 자신을 신비롭게 느끼기를, 예컨대 미묘한 열등감을 좀 느끼기를 바라는 양태의 정서적 관성은 어떤 ‘신화’로서 자기 기억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덧없는 현실도피와 관련되어 있을 모양이다. 말하자면 주관 세계에 대한 과대평가나, 어떤 사소한 ‘책임’에 대해 있는 힘껏 수행되는 과소평가나 무시, 외면 등이 그 부작용으로서 간주되곤 하지 않던가.

따라서 ‘굳이’ 신화의 역할을 역설하자면, 동일시된 주인공이 동일시하는 독자에게 주는 어떤 선민의식이 최후 목적의 전부이자 유일한 효과가 되곤 하지 않나 말이다. 가령 개인으로 분리되기 두려운 집단의 화신들이 어떤 분리불안 위에서 집단적으로 신화를 소비하곤 하지 않나. 그게 설령 ‘개인주의’에 대한 신화일지라도, 그처럼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집단에게 (심리적으로) 소속된 개인주의자들이, 소속된 예의 집단에게 ‘공감이 아닌 동일시’를 재차 제공하고 또 요구하며 그렇게 ‘신화’로 묶여 정신적 몸집을 부풀린 ‘개인주의’적 집단이 어찌나 자주 자랑스럽게 무리 지어 서로 동일시하며 그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지.

자부심을 위해 기억을 바꾸다 못해 지금의 현실 또한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실 부정’의 어떤 관성이 이 특정한 종류의 ‘허구’에 도사리고 있을 양이다. 혹자는 이를 소위 ‘원형’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굳이’ 저기 저 신화에 주의를 두고, 그 종류별로 분류를 해서 어떤 패턴을 발견하는 양의 도피의 원형을.

허나 모든 허구의 목적이 저기 저 도피는 아닐 터다. 이를테면 어떤 가설은 현실에 도달하기 위한 교두보가 될 수 있듯. 마찬가지로 어떤 허구는 그 자체로 현실을 구성하고 있기도 할 양이리라. 그렇다면 ‘현실’에 접근하고 이를 재차 분석하기 위한 ‘허구’와 현실에서부터 ‘도피’하고자 할 적에 활용되는 ‘허구’가 따로 있는가? 하지만 현실을 분석하고자 하는 ‘허구’가 (예컨대 가설이라는 이름으로라도) 현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모양으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허구’ 또한 현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지 않나. 말하자면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이들조차 그 누구보다 현실에 속해 있으며, 그들 망상의 기원이 현실에서 출발했고, 설령 실천하지는 않더라도 머릿속에서나마 그 ‘도피’적 상상을 전개하는 그들이 늘상 속해 있고 속해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속해 있을 곳은 오로지 저기 저 ‘현실’ 뿐이지 않던가 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허구의 목적이 ‘도피’일 수도 없지만, 그것이 현실에 관한 한 ‘도피’인지 ‘접근’인지 구별하기 위해 활용되는 기준이 소위 ‘객관’적일 수도 없으리라. 우리는 ‘허구’ 자체만 보고 이를 판단할 수 없다. 이를테면, ‘허구로 도피하는 방어 기제’를 연구하는 학자가 연구하는 ‘허구’는 분명 현실을 분석하고자 하는 과녁을 지니고 있으나 당 허구 자체의 기원은 그 저자들로부터 ‘도피’라는 ‘사명’을 받았을 모양이니. 따라서 ‘허구’ 자체가 아니라 그 활용 양상을 통해 그것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지, 아니면 ‘현실’에 다다르고자 하는지 얼마간 알 수 있으리라. 또한 이 주관 세계 각각을 살피고자 하는 태도 자체도, ‘도피’라는 현실의 일부를 분석하고자 하는 접근 방식일 모양이고.

그러므로 그 주제가 어떤 철학이건, 그리고 그 철학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되는 무슨 종류의 정신분석이건 상관없이 당 기제가 현실과 자신을 직면하고자 하는 발달 기제인지 그저 도피하고자 하는 방어 기제인지 가늠하는 기준은 당사자가 가진 ‘현실’과의 관계일 양이다. 자기 내부뿐 아니라 외부까지 포함하는 ‘현실’을 분석하고 대응하고자 하는 ‘발달 기제(이를테면 이념의 발달이나 ‘허구’의 발달로서의 방향 전환)’를 ‘굳이’ ‘방어 기제’로 간주하는 궤변이 성립할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로, 자기 내면이나 그로부터의 바깥 중 어딘가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방어 기제’가 결코 ‘발달 기제’가 될 수 없는 까닭 또한 이 두 ‘개념’의 기준이 다름 아닌 저 추상적이고 누구도 다다를 수 없는 ‘현실’, 가상의 ‘현실’, 그러니까 임의로라도 ‘현실’로 간주되는 과녁이기 때문이리라.

고로, 혹자의 ‘허구’가 도피를 위해 탄생했다손 치더라도 예컨대 다른 이에게 이는 최소한 도피의 양태를 증언하는 자료로써 현실에의 접근을 가능케 할 수도 있는 셈이며, 달리로는 다른 접근과 분석의 양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바, ‘허구(작품)’ 자체는 ‘현실’의 반대가 아니라 도리어 그 ‘현실’을 구성하는 임의의 매개물들일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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