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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Feb 03. 2024

31 사랑이라는 이미지

시즌 3 FICTION

흔하게 발견되는 도피처로서의 ‘굳이’ 고상하고 성숙하고 아름다운 환상을 결과로써 산출하여 그 폐해를 변명하고자 하는 저 흔한 ‘자기애(나르시시즘)’가 아니더라도, 혹 여타의 온갖 사랑에 대한 소위 듣기 좋은 헛소리가 손쉬운 형용사로 어른스러움을 굳이 과시한다손 치더라도, 실상 사랑은 그 자체로 얼마간 배타적인 ‘개념’이다. 요컨대 자기애뿐 아니라 연인 간 사랑이나 가족애, 나아가 온갖 그늘진 자리에 있는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적’ 사랑(박애)조차 이미 얼마만큼의 ‘경중’을 따지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이를테면 삶의 모든 요소들을 퉁 쳐서 ‘사랑’으로 결론내리고 갖은 논의와 고민들을 섣부르게 매듭짓고자 하는 시도들을 우리는 얼만치나 쉬이 목도하던가. 허나 사회의 그늘진 자리에 해결책을 마련하는 건 값싼 동정이나 약자적으로 동일시된 피해에 관한 의식적 관성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처럼 사랑에의 개념조차 될 수 없는 사랑에 관한 그저 이미지가 아니라, 저 끝나지 않는 사회학적이고 구조적인 ‘논의’와 ‘고민’들이 아니던가.


말하자면, 스스로 성자로서 자랑스럽게 사칭하지 않는 한 모든 종류의 개념으로서의 사랑은 ‘울타리’를 전제할 수밖에 없을 양이니. 사적이건 공적이건, 우리는 무엇을 다른 것보다 더 사랑하고, 굳이 정서 발달의 단계적인 돌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어떻게 사랑을 주는지에 관한 획일적인 방법론은 마찬가지의 획일적인 정답을 그어주지도 않는다. 사랑을 더욱더 많이 받는다면, 물리적이거나 사회적이진 않더라도 심리적으로는 무언가 해결될 거라는 이 손쉬운 '이미지'적 ‘충고’는, 그러니까 이처럼 손쉽고 획일적인 이미지를 토대한 가설은, 임시방편의 위로로서 잠깐 기능할지언정 ‘임상’적이거나 현실적인 대응을 산출하지는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어찌나 자주 훼방 놓을는지. 단계적으로 완벽하게 삶을 회복시킬 수 있는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 따위는 어떤 종교적인 구절 속에나 들어있는 신화적인 이야기고, 그것이 하나의 환각적인 미끼라는 의미에서, 그러니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식으로, 그토록 흔하게 발견되는 도피처의 일종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던가.


저와 달리, 우리가 우리 삶을 얼마간 현실성 있게 회복시킬 수 있는 단서들은 다름 아닌 우리 삶에서 발견되어야 하지 않겠나. 삶에 속해있지 않은 ‘이미지’에, 저 흔하디흔한 환각적 미끼에 충실하게 삶을 바치는 일 따위는, 그러므로 애초부터 우리 삶에 속해있지 않다고 설정된 무언가를 원하도록 추동하는 동시에 그 무언가가 부재한 자기 삶을 재차 원망하는 원한으로 내모는 소위 ‘사랑’의 이미지에 관한 저기 저 얇은 담론은 끝끝내 무얼 추동하고 있던가.


그런 이야기가 있다. 가령 퇴근길 위에서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이 열쇠를 찾고자 한다면,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부터 추정하는 게 먼저일 텐데. 그리 열쇠를 잃어버린 퇴근길과 완전히 동떨어진 장소에서, 그러니까 당사자 자신도 처음 간 골목의 가로등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던 그에게 그걸 왜 여기서 찾느냐고 물어보면 그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는 것이다. 분명 열쇠를 잃어버린 건 여기가 아니지만, 다른 곳에는 가로등이 없으므로 여기서 찾고 있다고. 다시 그에게, 그렇다면 거기에 열쇠가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자 그는, 그렇지만 가로등이 있어야 잃어버린 열쇠를 잘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재차 반문한다.

그리하여, 갖은 시설이나 제도와 같은 사회적인 안전장치들은 사랑(가로등)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삶(길)을 증거하지 않나. 이는, 무슨 무작위의 환상을 애써 보존하고 보듬는 게 아니라, 채 익지 못한 환상들로라도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안배하고 있을 테니까.

가령 성자의 사랑은, 소위 이야기하는 생명체의 본성이자 궁극적인 과녁으로서의 ‘사랑’은, 울타리 없고 비교 우위도 없는 무한정한 그런 사랑은, 그렇게 이념을 초과한 사랑은 우리가 아는 속세의 사랑과는 아예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자가 아닌 한, 또한 우리가 공적 삶과 사적 삶을 나누는 한 현실의 사랑은 아무리 고도화되어 봐야 곧장 하나의 ‘이념’이자 '개념'에 그칠 수밖에 없을 양이다. 거기엔 최소한의 심리적인 수지타산이라도, 안으로 굽는 팔의 형상으로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가령 ‘울타리’야말로 동일시된 ‘자아’의 수지타산이 작동하는 사랑의 기본적인 전제겠으므로.

따라서, 소위 사랑이라는 이미지에 기반한 ‘이념’적 환상이 외부 현실에 반응할 수 있도록 무르익기 전에는, 이 ‘사랑’이라는 자신의 (사적) ‘이념’이 이념 자체(어쩌면 어떤 종류의 수지타산)를 초과할 수 있다는 신화적 동일시가 여전히 작동하는 중에는, 이를테면 사랑을 베풀어 혹자의 ‘성장’을 도모하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중이라 스스로 믿는 일종의 ‘신념’은 끝끝내 ‘임상’의 ‘현실’에 대해 전면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셈일 수밖에 없으리라.

말하자면, 배타적인 사랑으로 시작해 그 울타리를 넓히기에는, 개인의 사랑과 성자의 사랑은 그 종류 자체가 출발부터 완전히 다르니까. 이를 혼동하면, 그러니까 개인적 사랑의 배타성이 성자의 무조건적 사랑의 정당성을 참칭하기 시작하면, 소위 모든 ‘사랑’이 (가상의 환각적이고 이상적인) ‘무조건적 사랑’을 담지하는 까닭에 ‘배타적인 사랑’ 혹은 ‘사적 사랑’ 또한 그 자체로 정당하지 않느냐는 언변으로 현실의 사랑 속에 섞여 있는 배타성과 일방성을 온갖 이웃에게 호소를 빙자하여 강제할 우려가 있을 터다. 요컨대 이 순간 검열 없이 들뜬 사랑의 경솔한 주장(가해)은, 그저 감정의 발산과 해소를 위해 소위 ‘사랑의 대상’을 예의 저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그 일방적 가해의 희생양으로 지목하는 이상이 될 수 없으리라.

주요한 건, 덮어놓고 사랑을 실천하거나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기 배타성에 관한 스스로의 명확한 인식, 이를테면 자기 감정의 발산과 상대에의 배려를 구분하는 끝나지 않을 ‘검열’이리라. 우리는 아무도 성자가 아니고 설령 그와 같은 신화 속 성자들을 참칭한들, 이는 그저 ‘사적’ ‘공적’ 관계에서 소위 ‘사랑’이라는 담론을 도피처로 삼는 방식으로 ‘검열’을 폐기하고 감정만 발산하겠다는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자기 선언에 그치는 데 불과할 양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감상의 발산적 ‘명분’으로서 예의 ‘사랑’은 자의적으로만 과잉된 특정 유효성으로 나머지 유효성을 방해하는, 종종 그런 나약한 도피처로서의 허구이곤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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