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사례로 치자면, 일견 환경 오염은 무슨 종류의 변화를 뜻할 텐데, 요컨대 ‘오염’과 ‘정화’를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을는지. 여기 묵음 처리된 건 그 잣대로서의 ‘사람’이다. 가령 사람 아닌 생명 그 자체가 기준이라면, 실상 오염된 환경에야 비로소 살 수 있는 생명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예의 생명이 이를 ‘오염’으로 정의하진 않을 테니. 그러니까, 어쨌거나 이 환경 오염의 기준은 환경 자체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살만한 ‘환경’으로부터 실정적인 환경이 이탈할수록 ‘오염’이라 정의하는 셈이므로. 한편 사람에게 지금 유용하고 앞으로도 유용한 환경이 될수록 그 변화는 ‘정화’로 정의되는 모양이고. 어떤 동물이 죽어가고 무슨 식물이 사라지든 간에, 실상 저 ‘오염’이 끝내 사람 또한 지구에서의 생태를 장담할 수 없도록 몰아가지 않는다면, 그처럼 저기 저 환경 ‘변화’가 사람의 생태(문명)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환경 ‘오염’이라는 명칭보다야 여기 이 환경 ‘변화’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지 않았을는지.
오염이건 정화건 마치 환경 자체가 기준인 양 언어가 그토록 위선을 떠는 와중에라도 그 사용처와 심각성의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를 살피면 매번 거기에 ‘사람’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 모든 언어가 사람의 문명이 정의한 결과이며 과정인 까닭이리라. 굳이 환경 그 자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하고 그 죽음을 걱정하는 모양으로 쉬이 이 환경 오염이라는 주제를 설명하는 건, 마치 유아에게 그러하듯 ‘의인화’가 어떤 흔한 유사 설득력을 그토록 섣불리 머금는 덕택이겠다. 환경이라는 ‘개념’의 엄밀한 정의, 혹은 그것이 과연 우리가 쉬이 언급하곤 하는 유기적 생명체인지의 여부에 관한 밀도 높은 논의, 심지어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상황마다의 확인, 나아가 세계를 구성하는 단위 개체란 어떻게 임시적으로라도 설정되고 해체되며 작동하는지에의 탐구 등은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평행한 담론의 축을 지닐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환경을 생명에 비유하며 그것이 오염되어 죽어간다는 흔한 ‘의인화’는, 이 문장을 사용하는 화자를 포함해 ‘인간’이라는 종에게 위협이 되는 환경 ‘변화’를 그 위협의 논증이라는 어려운 정공법보다 거기 속한 감정선만 손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대중적’ 의도를 ‘굳이’ 함축하고 있지 않나.
논증이 현실 인식의 수단이라면, 비유는 내용보다는 내용을 전제로 한 감상의 전달이나 호소의 수단 (예컨대 문학 등) 아니던가. 거기서 우리는 내용으로써 인식한 현실을 호소하기도 하나, 다만 망상을 호소하기도 한다. 현실이냐 망상이냐, 또는, 그러니까 환경 ‘오염’이냐 환경 ‘변화’냐 하는 등의 무수한 구분들은 문장을 구성하는 ‘화자’와 ‘환경’의 관계를 토대한다. 화자 자체의 구성 요소는 ‘절대적’이고, 환경의 구성 요소 또한 근본적으로 ‘절대적’이며, 화자와 환경 각각이 가진 시간과 공간에 따른 변화도 ‘절대적’인 데다, 마침내 화자와 환경의 관계 또한 절대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변화하는 화자와 변화하는 환경 간의 변화하는 관계라는 높은 층위의 레이어에서 우리는 이를 상대적이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환경이라는 요소와 인간이라는 요소 간의 관계가 너무나 치명적이라, ‘환경 오염’이라는 단어의 용도가 단시간에 크게 변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환경 오염’이 ‘악’이라면, 그러니까 나쁜 무엇이라면 그건 그저 ‘화자’인 우리 인간에게 그러하리라.
그와 같은 ‘악’처럼 ‘선’ 또한 다층적인 ‘절대적’ 레이어를 뭉뚱그려서 설명하는 까닭에 ‘주어’와 ‘목적어’ 각각의 변화량을 추출하고, 그로부터 관계를 끌어낸 후에 다시 그 관계의 변화량을 추출하여 당 양태적 방향성을 추정한 이후에 임의적으로 선언할 수 있는 소위 상대적인 ‘이미지’일 양이다.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선’이 누군가에겐 ‘악’일지도 모르므로, ‘선악’의 판별은 출발부터 관계(의 관계의 관계의 … 관계)에 의존하는 ‘이미지’일 터다. 가령 어떤 규칙(문법)이 있고, 주어가 있고, 목적어가 있고, 다시 예의 문법(규칙)의 변화량, 예의 주어의 변화량, 예의 목적어의 변화량, 그리고 예의 관계‘들’의 변화량, 그리하여 예의 변화량들의 재차 변화량‘들’이 마치 ‘상대적’인 모양으로 선악의 구분에 추상적인 한도를 그어오며 개인에게는 임의적인 자아를, 집단에게는 극복되어야 할 전통을 늘상 단순한 질료(이미지)로써 생산해 제공하곤 하는바. 따라서 자아와 전통은 그 판례에 따라 온갖 ‘이미지’를 못 박아 선언하는 폐쇄된 경향성이자 고착된 경로의존성이 될 수밖에 없곤 하지 않던가.
소위 온갖 ‘의인화’가 (개념으로 ‘발달’하는 데 실패한) 이미지에 의존하며 호소하여 ‘자랑스러운’ 자아와 전통이라는 이미지를 다시 건립하곤 하지 않나. 저 순간 당 이미지에 중요한 건, 자아나 전통 자체와 같은 내용이나 그 구조가 아니라 거기서 활용되는 ‘자랑스러운’이라는 형용사(질료)에 불과하겠다. 그러나 이미지(질료)가 개념으로 ‘발달’하고자 한다면, 이제 그로 비롯된 가상의 선택과 차후 영향도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필수 요소로 뒤따라야 한다. 이 검사(검열)가 적확한 미래를 그리진 않더라도, 우리는 때마다의 유효성 검사를 통해 매번 유효한 개념을 추출하고자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환경 오염은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오염(변화)의 결과로 어떤 구체적인 경우의 수들이 우리 삶에 도입되는지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추정’은 ‘자랑스럽거나 개탄스러운’ 등의 정념적 이미지와 상관없이 작동(해야)한다. 이미지는, 추정이 작동할 때가 아니라 그게 끝나고 다시 그렇게 추정된 개념을 (마음에 정치적으로) 호소할 때야 겨우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의인화’는 이 ‘추정’을 건너뛰고 동의를 얻고자 하는 ‘섣부른’ 지름길이자, 내용보다 포장지만 보고 상황을 넘기고자 하는 샛길이다. 그렇게 ‘의인화’는 동일시를 가속한다. ‘의인화’는 독자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이입되게 한다. ‘의인화’는 분석을 건너뛰게끔 유도한다. 그처럼 ‘의인화’는 무수한 관계 간의 상호작용을 건너뛰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환원하는 방식 등의 ‘정념의 이미지’에 호소한다. 의인화는 ‘구조’보다 ‘질료(이미지)’에 호소한다. 그러니까, ‘개념’보다 ‘이미지’에 (‘관심’을) 호소한다.
요컨대 여기서 이미지(질료)는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는 동시에 우리 ‘자아’나 ‘전통’이라는 과거의 유산에 한정된 응석의 응용 범위를 가진다. 그런 덕택에, 이를 극복해 오늘의 현실이라는 추상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자명성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아(전통)’가 원치 않았던, 그러므로 (오직) 불편한 ‘도전’들(만)을 교두보 삼아야 할 양이다. 이 ‘도전’들은 앞서 언급한 ‘자아’나 ‘전통’이라는 이미지들끼리의 충돌에 자리한 ‘모순’일 수도 있고(가령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해 바로 그 자아상을 붕괴시켜야 했던, 차후 개념적 ‘발육’의 출발점으로써의 ‘유아’의 오래된 자기모순처럼), 혹 피치 못한 현실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모순과 한계들은, 깨끗한 이상이나 처절한 지옥의 이미지 등과 같이 매끄러운 외양을 가지지는 않을 모양이다. 거기서 ‘발달’하여 매개되는 (이미지(질료)가 아닌) 개념은, 그러니까 이미지라는 (동일시를 전염시키는) 자의적이고 부정확한 응석이 섞이지 않는다면, 언제나 이해되고 비판되는 방식으로만 그 자명성을 유지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