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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욕망의 규칙

시즌 4 HOW

by 이채

소위 긍정과 부정은 목적어를 가진다. 그러니까, 무얼 긍정하고 부정하는가 하는. 또한 우리네 인식의 범위에서 부정은 긍정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결핍은, 결핍 이전 상태를 가상으로라도 전제한다. 이를테면 가졌던 과거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가졌어야 할 ‘미래’도 전제할 수 있듯. 어떤 종류의 결핍은 오로지 자의적인 상상에만 의존하는 경우도 있을 양이니. 결핍이 가정하여 돌아가고자 하는 건 일종의 무결성이라는 가상이므로, 우리는 부정하고자 하는 순간 부정의 대상을 우선 가상으로라도 긍정해야 하는바. 부정하는 순간, 부정의 대상은 이미 존재한다 긍정되고 있다.

가령 혹자의 망상을 부정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망상이 그 자체로의 외부 현실은 아닐지언정 현실에서 작용하는 한 사람의 정신 안에서만큼은 착각으로조차로서의 현실이라고라도 긍정해야, 말하자면 ‘망상’의 망상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해야 이를 다시 연산할 수 있다. 허나, 여기서 우리가 연산하는 건, 망상의 현실성이지 망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처럼 우리가 어떤 생각을 현실성 없는 망상이라고 가늠할 때조차, 우리가 부정하는 건 망상 자체가 아니라 망상으로서 망상의 현실성이므로. 고로, 망상의 현실성을 연산하며조차 이미 우리는 망상 자체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긍정의 최초 동기와 최종 목적지는 소위 ‘현실’에의 긍정으로 소급되고 수렴되고야 말 텐데. 그럼에도 모든 의도는 얼마간은 언젠가의 응석에서 출발했다 할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현실을 긍정하고자 하는 건, 현실을 더욱 긍정할 만한 무엇으로 변경하기 위해서인 까닭이기도 하니까. 그리하여, 어느 날 저 상상이 추론으로 극복되더라도, 그 정도가 다른 추론과 상상 각각의 동력은 최초의 출처를 같이하지 않던가. 이를 응석이라 부르던 욕망이라 부르던, 그 당위가 타자를 얼만치나 고려하는지(책임)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 역량은 예의 변화하는 목적성의 변화량을 얼만치나 현실에 관철할 수 있는가로, 그리하여 관철하기 위해 현실을, 나아가 현실의 작동 자체를 얼마나 ‘긍정’하고 또 따라잡을 수 있느냐로 수렴될 양이다.


그처럼, 현실에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현실을 일단 긍정하는 것. 마찬가지로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욕망을 우선 조정하는 것. 바로 여기서 시간성의 배아로써의 ‘인과’가 등장하지 않나.


가령, 장기적인 욕망을 위해 단기적인 욕망을 조정하는 방식을 계획이라 명명하더라도, 여기서의 계획 또한 [재차] 욕망에서 발생하는 셈이다. 말하자면, 계획이라는 기호가 지시하는 행위가 어떤 우발적인 사태를 온전히 예견할 수 없듯, 계획 후에 우연히 발화할 여타의 욕망 또한 예의 계획에서 온전히 예견할 수도 없을 모양인데. 그런 의미에서 무수한 계획을 통한 단련 자체는, 무수한 틀어짐 속에서 이미 만든 계획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과 그 실천 방안의 유효한 변화량을 아울러 소유한 욕망 테크닉의 단련 자체가 아니던가.


그와 같이 저기 저 ‘계획’에서 문제시되는 건 욕망에 대한 [재차] 욕망이다. 이는 무슨 욕망은 억압하고 어떤 욕망은 표출할지에 대한 보다 추상적인 층위의 욕망이며, 고로 욕망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는 욕망이다. 그처럼 장기적인 욕망 아래 단기적인 욕망을 얼마나 조정할 것인지에 대한 가공의 척도는 얼마만큼 과거나 미래로 사로잡혀 살 수 있을는지로 살필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소위 계획에서 벗어난 욕망만이 ‘현재’적인 욕망이라 쉬이 단언하는 건 여전히 이미 그 도피에의 의도만을 전시하는 데 불과할 양인데. 언제나의 욕망은, 설령 그 과녁이 실로 ‘가상’적이더라도 어쨌거나 ‘가정법’에 근거할 까닭이리라. 말하자면, 고민 없이 발산만 하고자 하는 일차원적인 욕망조차도 원하곤 하는 건 설정(과거)이 바뀐 현재거나, 찰나간의 미래에 그 뿌리를 둘 양인 것처럼. 그러니까, 가령 허기진다는 건 그저 상태를 이야기할 뿐이지만, 식사를 욕망하는 건 곧장 그것이 성취될지언정 아주 가까운 미래라도 지목하는 셈이므로. 또 한편으로 소위 현재를 욕망한다 주장하는 건, 다름 아닌 바로 그 ‘현재’가 욕망을 성취한 상태가 아니라는 방증인 동시에 그리 욕망 되는 상태가 현재 벌써 일어났어야 했다는, 시간상으론 벌써 불가하도록 틀어진 명령 상태에 다름 아니리라.

그와 같이 이미 욕망 자체의 존재부터가 당 욕망의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걸 종종 반증하곤 하므로, 예의 계획하고자 하는 욕망이건 당 계획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건 간에 벌써부터 어떤 항구적인 불가능이 거기 도래해 있을 양이다. 따라서 이 또한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로 소급될 수밖에 없을 모양이니. 그런 덕택에 우리가 무슨 계획 하에서도 우리 욕망이 위반하고자 하는 대상은 우리네 또 다른 욕망일 수밖에 없을 터다. 일견 우리가 사회에 대한 위반을 욕망하더라도, 끝내 우리가 위반하고자 하는 건 사회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인 욕망’, 그러니까 사회를 울타리 삼고자 하는 욕망이자 그런 사회를 따르고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에 비롯한, 바로 그런 이상적인 사회로 작금의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최소한 언젠가의 자기 욕망으로부터 추론된(그렇지 않으면 당 욕망을 알아볼 수 없겠으므로), 그리하여 늘상 얼마만큼은 스스로의 욕망일 테니까.

그리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당 욕망에 인과를 도입하고, 욕망 자체에 순위를 지정하며, 서로 상충하는 욕망에 질서를 매기는 건, 마침내 우리가 욕망을 길들이고자 하는 ‘노력(가공)’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출발선은, 그것이 1차원적이든 고차원적이든 그런 욕망 자체와의 동일시에서 우리가 풀려나는 일일 모양이다. 기실 우리는 욕망이 아닌 까닭이다. 그처럼 우리가 매 욕망 자체와 아울러 동일시하면서는 욕망을 조정할 수 없다. 욕망을 조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저 모든 욕망을 성취할 수도 없다. 욕망들을 그저 발산하면서 우리는, 상충하는 욕망들 서로의 딜레마에서 영영 벗어날 수도 없다. 상충하는 딜레마라는 동어반복(체질)의 도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우리는, 역량 자체의 발달을 도모할 수도 없을 테다.

그렇게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욕망을 조정하고자 하던 어느 날, 그렇게 언젠가 무수한 해결책에 관한 딜레마에 적응하던 어느 날, 우리의 과녁은 욕망의 발산이라는 명료하면서 헛된 응석(체질)에서 욕망 자체를 길들이는 끝나지 않는 가공(노력)의 작업으로 소급(수렴)될 양이다. 우리는 끝내 욕망과 공생해야 한다. 그와 같이 욕망으로부터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이어 그리 욕망을 다루면서, 스스로 자신의 ‘고착된’ 정체성이라 믿었던 ‘자아’는 점차 희미해질 양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다다르는 자리는 과연 저기 저 자랑스럽고 어른스러운 ‘무無’일까? 그럴 리 없으리라. 그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포함된 연속성을, 우리 자신을 관통하는 삶이라는 유일한 양상을, 소위 객관이나 주관이라는 긴 역사의 자의성과 관련 없이 점차 더욱 긍정하게 될 뿐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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