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nothing matters,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청과상

K-딸내미들은 왜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까. 지독하게도 대물림되는 이 깊고도 끈질긴 짝사랑, 분명 어느 집이든 모녀 관계의 애증을 노래한 각자의 대서사시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엄마를, 엄마는 할머니를, 할머니는 증조할머니를. 어떤 노래 가사처럼 서로의 '딱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는데도 우리는 기가 막힐 정도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런 딸과 그런 엄마가 수십 개의 멀티버스 안에서 빌런과 히어로로,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으로 부딪히고 소리치고 울고 웃다 끌어안는 영화다. 그 옆에서 온갖 개판을 이끌고 지켜보고 따라가던 남편이자 아빠가 절절하게 호소한다. "우리 제발 이 모든 걸 그만두고 서로 사랑할 수는 없는 거니?"


나의 이십 대 초입까지 우리 모녀는 지긋지긋하게도 다투고 싸우면서 서로에게 막말을 퍼부어댔다. 그러다가도 소강상태에 이르면 하소연을 해대기 바빴다. 이게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비단 K-가정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어머니와 딸내미들 관계의 대부분은 이 두 마디 문장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 같다. 딸을 너무 사랑해서 이래라저래라 하게 되는 엄마와, 그런 엄마가 괴로운데도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억울하고 갑갑한 딸. 우리가 정말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이렇게까지 죽일 듯이 싸워대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스물한두 살 시절의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닦아내며 생각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엄마인 에블린은 영화 초입부터 무지하게 정신이 없다. 오후까지 국세청에 가져가야만 하는 영수증들은 산더미로 쌓여 있고, 아래층에서 운영 중인 세탁방에서는 고객이 찾아대고,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남편은 자꾸만 무슨 말을 걸려고 얼쩡댄다. 게다가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엄격하고 깐깐한 아버지도 봐야 하고, 이 와중에 하필 오늘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를 데려온 레즈비언 딸도 한 번 흘겨봐야 한다. 저녁에는 세탁방에서 파티를 열기로 해서 여러모로 시간도 촉박하다. 누가 톡 건드리면 금세 터져버릴 것 같은 그녀를 지켜보다 보면 관객의 입장에서도 긴장에 숨을 삼키게 된다. 어떡하냐 진짜, 그런 심정으로 에블린을 따라가다 우리는 갑자기 통돌이 세탁기에 내던져진 빨랫감처럼 영화의 중심 설정에 휘말리게 된다. 양자경의 '멀티버스'.

국세청 엘리베이터에서 남편 웨이먼드는 갑자기 빠릿한 얼굴이 되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들을 늘어놓으면서 뭔가를 손에 쥐여준다. 웬 종이와 함께 기묘한 송수신기를 받은 에블린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청소도구실로 직행하느냐, 아니면 국세청 직원 앞에 앉아 신발을 바꿔 신느냐. 에블린은 이 바보 같은 지령을 보고도 일단은 답도 없는 현실을 해결해보고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른쪽 신발을 왼쪽 발에 신어 본다. 그리고 그녀가 만나게 되는 건, 에블린의 인생의 어딘가에서 어떤 선택을 하거나 하지 않았더라면 되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가능성의 한 갈래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서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지금의 루트로 이어졌다.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까 같은 사소한 질문들로부터 이 회사에 이력서를 쓸지 아니면 저 회사에 지원할지 같은 물음들까지. 오늘 내가 이 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퇴근길에 운명의 반쪽을 만나게 되었을 수도 있고, 십몇 년 전 언젠가 어떤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평생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에블린은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수없이 도망친 '덕분에' 누구보다 많은 멀티버스의 본인들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쿵후 마스터가 될 수도 있었던 에블린, 어딘가에선 명창이 되어 있는 에블린, 또 다른 세계에선 기예에 가까운 요리 기술을 선보이는 셰프인 에블린, 그리고 손가락이 핫도그 소시지인 황당한 세계에서 국세청 직원과 사랑하는 사이인 에블린까지. 알파 버스의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조부 투바키'라는 이름의 빌런을 막아야만 한다고 요청한다. 이름도 이상한 이 악당은 팝가수 뮤직비디오에서나 볼 법한 총천연색 의상을 입고 에블린의 앞에 처음 등장하는데, 어쩐지 생긴 게 낯이 익다. 멀티버스를 위협하는 최강의 빌런, 조부 투바키는 바로 그녀가 사랑하는 동시에 사랑해 주기가 어려운 딸, 조이다.

에블린은 조이에게 사랑한다, 보고 싶다, 믿는다는 말 대신 잘 좀 먹고 다니라고, 살이 찐 것 같다고 말한다. 조이는 엄마의 이런 발화 방식을 이해하고 있다. 그건 사실 엄마 나름대로의 걱정과 애정이라고. 하지만 이해와 별개로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다. 오랜만에 보는 딸한테 자주 들렀으면 좋겠다고, 네가 보고 싶으니 연락을 해달라고, 그렇게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이는 엄마의 애정과 걱정에서 비롯된 '네가 이랬으면 좋겠구나'에 질리다 못해, 속이 텅 빈 베이글을 발견해버린다. "Nothing matters," 그러니까 아무것도 소용없다는 허무주의적 번아웃의 종착지인 그 베이글. 그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무無가 약속된 시공간이다.


에블린의 남편이자 조이의 아빠인 웨이먼드는 사실 영화 초반부터 에블린에게 내밀어볼 이혼 서류를 들고 다닌다. 정말로 이혼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이걸 계기로 에블린과 대화의 물꼬를 트고 싶어 한다.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고려하게 될 정도로 힘든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달라고, 그리고 우리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같이 인지했으면 좋겠다는 어필이다. 웨이먼드는 국세청 건물에서의 전투 중간에 끼어들어 양측에 대고 (울먹이면서) 묻는다. 그냥 싸우지 않는 방법은 없는 거냐고. 에블린이든 적이든 이게 무슨 말이냐는 식으로 코웃음을 치지만 웨이먼드는 멈추지 않는다. 배우-에블린의 앞에 나타난 옛 애인-웨이먼드가 말한다. 당신은 항상 당신만 전사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나도 나만의 방식대로 싸워 왔노라고. 웨이먼드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은 '다정한 유머'다. 이 정신없는 세탁방에선 세탁물 자루에 장난감 눈알을 붙여놓고, 국세청 전장에선 에블린의 손을 잡고, 나중에는 국세청 직원에게 사정과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정중하게 사과도 건넬 줄 안다. 에블린이 이를 받아들인 다음의 전투는 재밌다 못해 귀엽기까지 하다. 날아오는 총알은 장난감 눈알로 바뀌고,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적들은 각자의 사소한 취향과 소소한 소망을 이루고 행복해한다. 좋아하는 머핀을 먹고 귀여운 인형을 끌어안으면서 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이 혼란 속에서 혼자서라도 베이글에 들어가고자 하는 조부 투바키, 다시 말해 조이를 끌어안고 당겨내는 건 에블린뿐만 아니라, 계단을 달려 올라온 웨이먼드와 할아버지 공공이다. 가족이 합심하여 그녀를 베이글로부터 사수한다. 왜냐하면 "nothing matters," 아무것도 소용없다면 우리 곁의 가족과 친구,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유머를 건네면서 살아가는 편이 이 세상에 이기는 방법이니까. 때로 말도 안 될 정도로 지치고 힘든 현실이 들이닥칠지라도.

영화 말미에서 에블린은 세탁방 창문 유리를 깨면서 사고를 치고 경찰과 대치 상황에까지 놓인다. 남편 웨이몬드의 회유와 설득으로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는 에블린에게 선처를 베풀고 둘은 영화 내내 으르렁거리던 건 싹 잊은 것처럼 세탁방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아 속 얘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집을 떠나려는 조이에게 에블린은 드디어 제대로 말을 건넨다. 에블린이 멀티버스의 그 수많은 가능성들을 보고 왔음에도 진정으로 원하는 건 바로, 조이의 곁에 있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는 정답이 될 수 없다. 인생을 전쟁처럼 임하는 자세로는 아무것도 이길 수 없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다정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 속이더라도, 결국엔 사랑만이 정답이고 사랑만이 승리할 것이다. 미동조차 할 수 없는 돌이 되더라도 서로에게 부딪히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부딪혀 깨지더라도 끌어안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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