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배경사진 출처 :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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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이 극에 달한 사회를 향한 자기반성적 일갈이자 당대에 실행하는 루드비코 요법.
70년대에 개봉한 고전 중의 고전으로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개봉 당시에도 심의조차 없이 청소년 시청 불가 판정을 받을 정도로 이슈였다는데, 지금봐도 선전성이며 폭력성이며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수위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초입부 노숙자 할아버지의 열변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라는 영화가 생각나기도 하고, 볕 조차 들지 않는 너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있는 이야기를 하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가 달로, 우주로 나가고 있지만 기본적인 법과 질서, 선을 무시하고 욕망을 실현시키기에 가장 쉬운 방법인 악의 방법론을 따르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한 참담한 블랙코미디, 디스토피아 세계다. 1960~1970년대 2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이 극에 달한 사회를 향한 자기반성적 일갈이고, 당대에 실행하는 루드비코 요법인 것일 텐데 반 세기가 지난 요즘에 비추어 보아도 남 일 같지 않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아마 이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라질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일텐데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논쟁을 떠오르게 한다.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한가, 악한가? 필자는 따지자면 성선설을 믿는 편에 속한다.
인간의 사회와 선과 악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깊숙이 다루고 있다. 다만 참담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 자유를 찾고, 많은 희생 끝에 이를 수호하며 자유란 곧 옳다는 가치를 좇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자유의지로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고 책임질 수 없는 피해를 가하는데 있다. 내가 누군가를 때릴 수 있으니 때리고, 범할 수 있으니 범하고, 강탈할 수 있으니 강탈한다. 모든 파괴적이고 쾌락적인 상상을 현실에서 구현함에 있어 아무 제약이 없는 자유의지인 것이다. 이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끝에 등장하는 것이 리바이어던, 즉 국가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가?
유물론자 홉스는 인간이란 물질적 욕망 덩어리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욕망하고 해로운 것을 혐오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욕망은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더 나아가 생명을 빼앗는 것도 자연상태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본능적 욕망이 통제 없이 날뛰는 자연상태는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 다시말해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다.
만인이 만인에게 투쟁하는 야만상태에서 생명은 백척간두에 선다. 무제한의 자유가 낳은 무제한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순간을 살아가야 한다. 최소한의 안정된 삶과 문명은 꿈도 꿀 수 없고, 삶은 그저 끝없는 공포다.
영화의 절반이 지나가는 지점, 알렉스는 교도소를 나와 병원으로 이동하여 2주간의 루드비코 요법을 시행받은 후 사회로 돌아가게 된다. 루드비코 요법이란 모든 몸이 구속되어 눈도 깜빡일 수 없는 상태에서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상들을 시청하며 멀미와 구토를 유발하는 약물을 주입받는 것이다. 인간을 동물로 바라보고, 우리가 침팬지들에게 바나나와 자극 등을 통해 조건반사 실험을 하는 것처럼 특정 상황에 대해 구토감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마치 태엽을 감은 대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오랑우탄,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말이다. 폭력과 성욕에 조건반사적 구토감으로 벌벌 떠는 알렉스는 더는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없는 존재가 된 채 사회에서 차근차근 버림받는다. 집에는 다른 건실한 청년이 알렉스의 방을 차지한 채 자식 노릇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린치를 가했던 노숙자들에게 되려 린치를 당하고, 양아치 시절 부하였던 이들은 경찰이 되어 알렉스가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남편을 폭행하고 부인을 윤간했던 가정의 집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지붕을 제공받지만 긴장이 풀리며 흥얼거린 Singin In The Rain에 정체를 들키게 된다. 알렉스는 클래식을 좋아하며 특히 베토벤 교향곡 8번을 좋아했는데, 루드비코 요법을 행하는 중에 재생된 배경음악이 베토벤 8번이라 이 음악에도 거부감을 일으키게 되어버렸다. 반정부 인사로 알렉스와 루드비코 요법에 대한 책을 쓰고(이 책 제목이 시계태엽 오렌지이다.) 정부의 만행을 고발하려는 집주인은 알렉스에게 모든 정보를 듣고 난 후 그를 방에 가두고 아랫층에서 베토벤 8번을 크게 틀며 웃음 짓는다. 이에 괴로워하던 알렉스는 죽기 위해 창문으로 뛰어내리지만 살아남게 되고, 영화는 마지막으로 흘러간다.
알렉스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측 인사는 알렉스에게 시행한 루드비코 요법을 되돌려 그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으며 부귀와 영화를 약속한다. 이를 받아들인 알렉스는 같이 웃으며 어깨동무를 한 채 기자들 앞에서 사진을 찍히고, 정부측 인사는 거대한 스피커에서 베토벤 8번을 틀어준다. 알렉스가 환희와 축제 속 눈밭에서 여성과 쾌락을 탐하는 것을 마음껏 상상하며, ‘나는 완전히 치유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참고 : 김기현의 철학이 삶을 묻다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넘어서
2023.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