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꽃가게 덕분에 그럭저럭 살만했던 시절에, 엄마가 우리 가족 중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원래 아빠랑 부부 동반으로 가는 여행이었는데 왜 엄마만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아빠 없어도 꼭 가고 싶다며 떠났다.(그때나 지금이나 아빠 없으면 멀리 안 가려는 사람인데!)
말레이시아랑 싱가포르이었을까. 가물가물.
며칠간의 패키지여행에서 돌아온 엄마는 재잘재잘 세상 구경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장 흥미진진하게 얘기한건 한국인 가이드. 너무 자유롭고 멋있게 사는 것 같아. 해외에서 그렇게 사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00이(동생)도 그렇게 살면 진짜 멋있을 것 같은데. 등등
엄마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삶이었던 것 같다. 사업을 하든 이민을 가든 유학을 가든.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만 가서 사는 거지. 가이드라니. 여행 온 사람들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고 관광하고 돈 벌고. 그때 엄마 생에 처음으로 본 가이드는 자유 그 자체였는지 모르겠다. 내 동생에게 진지하게, 여러 번 가이드를 제안했다. 너는 가서 가이드하고 정착해. 엄마 놀러 갈게.
이후로 엄마 아빠는 중국 패키지, 일본 패키지 몇 년에 한 번씩 친구들과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다녔다. 미국도 가고 캐나다도 가고 유럽도 가고 러시아도 가고. 남미랑 아프리카 빼고 어지간히 패키지로 가는 데는 다 간 것 같다. 다녀오면 엄마는 이렇고 저렇고 얘기해 주고 아빠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뭐.’ 하며 쿨한 척하는데. 인터넷 카페에 멋들어지게 사진과 글을 남기고 또래 아저씨들 아줌마들이 달아주는 댓글에 혼자 뿌듯해하고 그런다. 아빠가 아니라 남자의 사생활이니까 못 본 척한다.
내가 25살 때 첫 해외 배낭여행으로 혼자 터키를 가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엄마는 여행비를 줬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성사된 여행이지 싶다. 터키라는 나라를 알고, 여자 혼자 다니는 여행을 알고, 그것도 처음 나라 밖을 떠나는 여행자를 알면. 후…
다행히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기도 했고, 과감하지만 굉장한 겁쟁이이기도 해서 어두워지면 절대 숙소 밖을 나가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렇게 조심하면 별일 없을 것 같았고 별일 없기도 했지만, 지금은 매 여행마다 아무 일도 없이 돌아올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하다.
지금. 나는 전 세계 어디든 시간과 돈만 있으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부모님은 건강이 허락되는 한에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빠는 은퇴 후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돌본 기간을 제외하고 근 10년을 비슷하게 살았다. 1년에 10번 정도 해외로 트래킹 또는 여행을 간다.(하루 전날 최저가 패키지 득템하면 공항에서 연락하는 때도 있다. ‘딸. 아빠 간다.’) 일 년에 한 번 한 달 정도 네팔에 다녀온다. 작년에는 동생과 함께 다녀와서 유튜브에 영상도 남겨두었다.(내 동생이 한 일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일) 일 년에 한 60번은 국내 산행을 가고 그중 절반 이상은 1박 또는 2박 3일 종주 산행이다.
엄마는 꽃가게 닫고 국밥집 차리는 바람에 가게에 묶여 국내 여행도 겨우 한두 번 갈까 말까이다. 맨날 꿈만 꾼다. 가게 닫으면 한 달 살이도 할 거고 캠핑카 사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여행할 거고. 혼자도 갈 거고 아빠랑도 갈 거란다.
“체에코(체코 경상도 발음)도 가고 싶고 서페인(스페인 경상도 발음)도 가고 싶고. 온데 다 가고 싶다! 니랑… 그리고 아빠랑. “
아들이랑 둘이서 가려고 했던 여행에, 아들이 외할머니를 초대하고(돈은 내가 내는데 초대는 왜 니 맘대로…),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초대하고, 그 둘은 본인의 아들(내 동생)을 초대했다. 그리하여 우리 다섯 명이 총출동하는, 첫 온 가족 해외여행이 성사되었다.
엄마 환갑 때 윤식당 가보고 싶다고 해서 발리, 길리 다녀온 후로 딱 10년 만에. 이번에는 동생까지 완전체로.
다들 베테랑이라 걱정이 없다. 준비과정도 조용히 착착 알아서. 나는 항공과 호텔, 동생은 보험, 현지 가이드(엄마가 말하던 가이드!!!), 현지 보디가드. 엄마는 우리 모두의 비타민, 아버지는 엄마의 비타민.
아들 녀석만 간간히 ‘빨리 가고 싶다!!’ 외친다.
다들 말이 없지만 조용한 설렘이 느껴진다.
준비과정도, 가서도, 다녀와서도. 뭐 하나 거슬리는 것, 걱정스러운 것 하나 없이 함께 떠날 수 있는 가족이라는 게 새삼 감사한 마음. 주절주절 나의 설렘을 기록한다.
이 설렘의 원동력으로 매일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