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뭔가 터득한 것 같아.
뭔데?
엄청 화나고 짜증 날 때, 어차피 이런 감정도 지나간다 생각하면 화가 좀 가라앉아.
오, 엄청난 걸 터득했네. 근데 어떨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빠한테 혼날 때. 얘기가 뭔가 엄청 길어져. 길어지다 보면 핵심에서 벗어나고 잘못한 거, 또 다른 주변의 것들, 지나간 것들 그런 거 얘기하면 점점 화가 나.
너의 느낌과 생각을 아빠한테 얘기해 보지.
얘기한 적도 있는데 감정이 안 좋으니까 대화가 더 안 좋게 길어지기만 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뭔가 잘못해서 혼날 때도 내 나름대로의 억울한 감정이 있을 수 있고 그러면 분노 같은 게 느껴져. 나도 그래. 그럴 때 엄마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 같아.
뭔데?
견딜만하면 너가 터득한 것처럼 그냥 참고 지나가고, 견디기 싫거나 견딜 수 없으면 상대방이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상황이 없게, 완벽하게 할 일을 해 버려. 나한테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거. 근데 둘 다 어려워. 결국 감정을 참던가 힘든 걸 참던가 둘 다 뭔가 참아야 되는 것 같아 ㅎㅎ
나 사춘기가 맞긴 한 듯.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화가 자주 나고 쉽게 화가 나.
그럴지도. 근데 너 어렸을 때도 그랬어. 짜증이 많고 예민한?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민감한. 그래서 난 익숙해 ㅋㅋ 겨울에 수영하고 싶다고 여행 가자고 해서 여름 나라로 여행 델고 가면 방에서 수영장까지 걸어가면서 햇빛 뜨겁다고 짜증 냈었어.
진짜? ㅋㅋㅋ 그건 좀 심한데. 근데 친구들한테 그런 얘기를 해도 되나?
어떤 얘기?
부모님 얘기. 스트레스받는 거 그런 거. 나는 그런게 좀 패륜처럼 느껴져. 애들이 그런 얘기할 때도 내가 동조하면 걔네 부모님한테 안 좋은 말을 하는데 동조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패륜 같아.
오.. 너가 그래도 엄마 아빠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나 봐. 갬동인데
ㅎㅎ
중학교 때 제일 그런 걸로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 같아. 아직 정확한 꿈이나 내가 스스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기기 전인데 해야 할 건 많아지고 하기 싫고 안 하면 혼나고. 고등학교 때는 스스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압박감이 있으니까 알아서 좀 하게 되는 것 같고.
그 말도 맞네.
친구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다들 그런 시기인걸 알게 돼. 부모님에 대해서 거친 말 쓰면서 나쁘게 말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너가 올바른 판단을 할 줄 아는 청소년인 거니까 완전 훌륭하고. 부모님땜에 스트레스받는 감정을 너 입장에서 친구들이랑 얘기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하면 좋아. 그럼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고 공감되고 위로도 되고. 엄마 또는 아빠랑 이런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 진짜 화났어. 내 감정이 이랬어, 하고 내 감정을 중심으로 얘기하면 내가 힘들었던 점을 얘기하는 거니까 부모님 욕을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겠다.
근데 딴 얘기도 있어. 내가 토요일마다 엄마 만나러 오니까. 애들이 자꾸 토요일에 어디 가냐고 묻는데, 나는 이혼한 거 다 말할 수 있거든. 근데 말하면 애들이 분위기 싸해져서 그게 짜증 나.
앗 포인트?
어 ㅋㅋ 앗포인트. 그 정적이 싫어.
그래.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너는 아무렇지 않은데 상대방이 말을 안 하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나 느낌이 들기도 할 것 같아.
어 맞아.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걔네들도 몰라서 그렇겠지. 어른들도 그래. 엄마도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아들이랑 같이 안 살고 주말에 만난다고 하면 엄마 직장 사람들도 정적.. 앗포인트 나와. 갑자기 딴 얘기하고 막.
(끄덕끄덕)
고등학생쯤 되면, 서로 힘든 얘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깊이 있게 나누게 되는 것 같아. 그러면 어떤 애들은 엄마 아빠 사이 좋아서 행복하고, 어떤 애들은 엄마 아빠가 너무 싸우는데 같이 있어서 차라리 이혼했으면 좋겠다고 하고, 어떤 애들은 너가 지금 엄마, 아빠 각각 용돈 받고 막 각각 여행 가고 이런 나름의 베네핏(?) 그런 거 부럽다고 하는 애들도 있을걸
ㅋㅋㅋ 그럴 것 같아.
나는 내가 선택한 이혼이지만, 너는 엄마의 선택 때문에 그 상황에 처한 거라서 더 곤란하고 마음이 안 좋을 수 있을 거 같아. 엄마는 아직도 다른 건 아무것도 걱정 안 하는데, 너가 엄마가 너만 놓고 도망갔다고 생각할까 봐 그게 젤 걱정돼.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그때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고, 지금은 이렇게 지내는 거 자연스러워. 우리가 사이좋은 것도 주말에만 봐서 그런 거 아닐까? ㅎㅎ
어 맞아 ㅎㅎ . 어릴 때라 기억 못 하는 힘든 순간들도 있었긴 할 텐데 어쨌든 잘 지나가고 있는 것 같아. 너가 아빠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고 어떤 부분을 힘들어하는지 엄마도 조금 알 것 같은데, 부부는 평생 살기로 약속한 거라서 소통이 안되기 시작하면 중간에 때려치워야 갈등이 사라지지만, 자식은 독립이라는 걸 할 수 있을 시기가 오니까 그때가 되면 잘 독립해서 너만의 삶을 살고 너만의 가정을 이룰 수 있으면 돼. 나는 너가 정말 좋은 어른이 될 것 같아. 엄마 아빠의 안 좋은 점이 느껴지면 나중에 내 아이한테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좋은 점이 느껴지면 나도 내 아이한테 이렇게 해줘야지 생각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엄마. 그런 말이 있잖아. 우리는 과거 속에 살아간다. 어제는 오늘의 과거이고, 오늘은 내일의 과거다.
오… 근데 앞 문장이랑 뒷 문장이랑 약간 결이 다른 듯? 어떤 맥락일까?
음.. 우리는 계속 과거를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거 아닌가? 그리고 힘든 거든 좋은 거든 어차피 다 지나가고 다 과거가 된다 그런 거?
오오… 맞네. 과거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오늘이니까 과거는 계속 우리한테 영향을 미칠거고.. 또 오늘 역시 과거가 될 거니까. 뭐든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살면 된다 그런 뜻일 수 있겠다.
어 맞아. 엄마 이제 자자.
응 그러자. 넌 말을 진짜 잘해. 점점 생각도 넓어지고 표현력이 풍성해지는 것 같아. 너가 클수록 진짜 기대가 돼. 너랑 대화하는 게 재미있어지고, 배울 점이 많은 어른이 될 것 같아서.
엄마 아빠도 말을 잘해.
둘 다 책을 많이 봐서 그렇겠지.
어 인정. 그게 제일 설득력 있네 ㅎㅎ
zzz..
마이 컸다. 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