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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ug 25. 202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실존에 대한 고민

heraclitus by abraham janssens, c. 1601 - 1602

  우리는 왜 태어났고, 왜 살며,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철학자들은 항상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죽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왔다. 아마 이러한 의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리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흔히 말하는 사짜일 것이다. 인간의 창조주도 아닌 그저 피조물인 한 존재가 어떻게 그 존재의 객관적 이유를 대겠는가. 그러게 우린 왜 태어났을까? 세상에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저 태어나진 것 일뿐. 하이데거는 이걸 피투성이라 말했다. 자의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타의로 생겨난 인간은 항상 자신의 실존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민은 죽음 앞에서 어느정도 실마리를 찾는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이다. 나는 2년전 이 피투성을 알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왜 이 사실은 이제야 알았을까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나라는 존재는 규정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세상에 던저진 기투체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내 실존에 대한 용기를 얻었다. 어차피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데 두려울까 뭐가 있을까 싶었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고 말했다. 인간은 용도를 위해서 잉태된 존재가 아니다. 지우개는 지우기 위해서 탄생되었고, 연필은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 탄생된 것처럼, 사물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형상이 정해진채 탄생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용도가 정해진 사물이 아니다. 인간은 주체이며, 대자존재이다. 

 

  미다스 왕이 사티로스를 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이 질문을 들은 사티로스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게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은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둘로 나누었다. 의지로서의 세계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표상 너머의 의지때문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따라서 금욕주의를 말한다. 정말 아무것도 욕구하지 않으면 실망이 적어서 비교적 행복할까. 


  대체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할까. 요새 그게 내 고민이다. 내 존재 자체가 내 고민거리다. 누군가 인생은 끊임없은 선택이라 했는데, 나는 그 선택때문에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우리는 실존이 본질을 앞서기에 자유라는 것을 선물받았지만, 그 부작용으로 불안이라는 감정도 느낀다. 하나의 선택을 할때 그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신중하며, 때론 포기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자유로울수는 없을까. 

 

  나는 어렸을때부터 이런 고민을 많이했다. 대체 삶은 어떻게 사는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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