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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ug 14. 2023

칸트를 이해한 척

as if understood Kant philosophy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초상화

  "칸트를 공부해라." 학회에서 뵌 대학원 선배님이자 모교 학부의 교수님이신 강** 박사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칸트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칸트를 공부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칸트는 피할 수 없는 존재이며,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상식적으로 다 아는 철학자이다. 그만큼 칸트가 철학계에 미친 영향은 위대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제일 많이 읽히는 철학서적은 니체의 작품이고, 가장 많이 연구되는 철학자는 칸트라고 한다. 


  칸트라는 철학자를 이 글 한편으로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칸트의 사상은 나에게 너무 어렵고, 방대하다. 그래서 솔직히 칸트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 글을 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칸트철학의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알게 되고, 글의 논리적 구조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성찰하는 계기를 가지길 바란다.


서양철학의 저수지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에게 모이고, 칸트 후의 철학은 칸트에서부터 전개된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칸트 이전에는 대륙의 합리주의와 영미철학의 경험주의로 크게 두 개의 갈래로 철학이 전개되고 있었다. 합리주의 철학자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있고, 경험주의 철학자는 로크, 버클리, 흄이 있다.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간략하게 말해서 이성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한다고 말하고,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비어있는 우리의 지식세계에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채운다고 말한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서로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합리주의는 자명한 이성을 지식의 원천으로 보고, 경험주의는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는 지식의 원천이 내제적이라 주장하지만, 경험주의는 외재적이라 주장한다 볼 수도 있다. 


  칸트는 이 두 갈래의 철학의 교점이라 말할 수 있는 철학자이다. 칸트는 감성을 통해 지각하고, 그 현상을 오성이 범주를 통해 정리해서 이성에 전달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감성을 통해 현상계를 지각하는 것은 마치 경험주의 철학과 같고, 오성이 범주를 통해 현상을 정리해서 인식하는 것은 마치 합리주의철학과 같다. 결국 칸트는 속된 말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하이브리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칸트의 가장 큰 영향 중에 하나는 인간의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를 지정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주체의 자명함을 코기토 명제를 통해서 증명했는데, 이 말은 이성의 자명함이 진리로 도달할 수 있는 출발점이며, 주체의 자명함이 진리도달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다르게 생각했다. 칸트는 우리가 보는 사물은 그저 감성에 의해 받아들여진 감각 자료를 오성이 범주에 맞춰 정리하고 이성에 전달해 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의 현상만 지각할 수 있을 뿐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칸트 이전에는 물자체와 현상계의 분리가 없었으나, 칸트 인식론 이후로는 나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칸트로부터 두 갈래의 철학이 나온다. 헤겔과 같이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철학자들과 쇼펜하우어처럼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는 철학자들로.


이성과 계몽주의

  칸트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해인 1788년에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을 투고했다. 사람들이 칸트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들으면 3대 비판서를 자동으로 떠올리기 때문에, 그가 역사철학 혹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칸트는 계몽주의에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산책하기로 유명한 그가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장 자크 루소의 책을 읽다가 그날만 유일하게 산책시간을 어겼다고 한다. 


  "감히 알려고 해라." 칸트는 이성의 사용을 통해서 인류가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칸트는 이성의 사용을 통해서 인류의 계몽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칸트는 이성의 사용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이성의 공적 사용과 이성의 사적 사용으로. 이성의 사적 사용은 개인을 위해서 이성을 쓰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집에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 나만 아는 지름길을 찾아낸다던가 인류 전체가 아닌 오직 개인의 편의를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성의 공적 사용은 인류의 발전과 진보를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만들어서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빌 게이츠가 윈도우즈 운영체제를 통해서 컴퓨터의 대중화에 힘썼듯이 말이다. 


  칸트는 이성의 올바른 공적 사용만이 인류를 계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계몽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감히 알려고 하라고 말한 것이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서 감히 알아내서 얻어낸 무언가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질문과 그의 대답인 3대 비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Was ist der Mensch? 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서 칸트는 세 개의 질문을 다시 던진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Was kann ich wissen?"이라는 질문을 통해서 인식론 혹은 '진'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고,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Was soll ich tun?"이라는 질문을 통해서 윤리학, 도덕 혹은 '선'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고,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Was darf ich hoffen?"이라는 질문을 통해서 아름다움 즉, '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칸트는 첫 번째 질문에는  『순수이성비판』(1781)을, 두 번째 질문에는 『실천이성비판』(1788)을, 마지막 질문에는 『판단력비판』(1790)을 통해 답했다. 그리고 이 3대 비판서를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해명하려고 했다. 


  백종현 선생님은 『인간이란 무엇인가?』(2018)에서 3대 비판서를 정리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자, 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 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난 솔직히 칸트이론 모르겠다. 초월적, 합목적성 등 용어도 어렵고, 감이 잘 안 온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내 탓이지만. 


초초초간단요약

『순수이성비판』(1781) 

인간의 인식은 감성을 통해 지각되어 들어온 현상이 오성에 의해 정리되고, 이성에 전달되면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현상계만 지각할 수 있을 뿐 물자체는 알 수 없다.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데,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하다.

『실천이성비판』(1788)

너의 개인적인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저 정언명령만 따라서 행동하라.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 행동하면 그건 선행이 아니다.

『판단력비판』(1790)

자연미 > 예술미

이성이 제대로 일을 못해서 숭고를 느끼는데 숭고는 두 가지가 있다. 

역학적 숭고 : 롤러코스터 타거나, 장엄한 파도를 마주칠 때 등 느끼는 쾌 아닌 쾌

수학적 숭고 :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는 등 이성으로 계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쾌 아닌 쾌


이렇게 글로 쓰고 보니까 나는 정말 칸트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물론 이 글에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담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느낀 건데, 난 칸트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칸트라는 어려운 존재가 일상처럼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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