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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25. 2023

Jacques Derrida

écriture et différence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데리다에 대해선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그의 어려운 문체와 난해한 사상 때문인지 그렇게 대중적인 철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면, 데리다를 결코 피할 수 없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카뮈와 같은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이 3H라고 불리는 하이데거, 헤겔, 후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면,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이들은 자신이 이렇게 불리는 것을 거부하지만)은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따라서 구조주의를 공부하려면 먼저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후기 구조주의 철학을 공부하면 더 수월할 것이다. 나의 경우 미셸 푸코를 좋아해서 그의 사유만을 오직 공부했는데, 그의 사유를 파고들수록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니체를, 당대 사유가 마르크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마르크스를, 그리고 데카르트의 코기토로부터 자명하게 여겨지던 주체를 해체한 프로이트를 공부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셋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니 그들의 다른 후계자인 자크 데리다와 질 들뢰즈를 공부하고 싶어졌다. 아 철학은 공부할수록 나의 부족함과 무지를 깨닫게 된다. 마치 목마른 조난자가 바닷물을 마시듯이.

  

  데리다는 유럽에서는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철학자였다. 심지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데리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하자 캠브리지 대학의 몇몇 원로 멤버들, 베리 스미스, 콰인, 데빗 암스트롱, 르네 톰 등 특히 분석철학적 성향의 철학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는 환대받는 학자였다. 그가 끼친 영향도 엄청났고, 그의 저서들도 아주 많이 팔렸다. 데리다의 해체는 아직도 말이 많다. 누구는 데리다가 사기꾼이라 하고, 누구는 데리다야 말로 진정한 니체의 적임자라고 말한다. 사실 데리다의 사유를 깊이 알지 않아도 철학은 할 수 있다. 데리다가 큰 영향을 미친 건 맞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철학자들을 통해 그를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칭 푸코주의자인 나로서, 그의 제자인 데리다의 사유는 나에게 언젠간 도움이 될 것 같다. 


écriture vs parole

  플라톤은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가시계인 현실 세계와 가지계인 이데아(idea)의 세계로. 플라톤의 이런 이분번은 아직까지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플라톤이 제시한 최초의 이항대립구조는 여전히 전해져 내려온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주인과 노예, 지배자와 피지배자, 남자와 여자 그리고 글쓰기와 목소리처럼. 


  플라톤과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글쓰기와 말하기 중에서 후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글을 남기지 않았고, 플라톤은 글을 대화체로 남겼다. 그들은 눈앞에서 얘기되는 것에 진리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할 때, 카톡과 같은 문자보다 직접 만나서 현전에 전달하는 게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문자 형태의 전언은 오해의 여지가 많다. 면전에 대고 말을 할 때는, 말하는 사람의 입모양, 눈, 숨소리, 어조, 톤 등 다양한 요소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진리에 가깝게 만든다. 물론 그의 내제적 이유로 인해서 그의 진심이 전해질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직접적인 정동을 전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목소리, 감정 등 그의 진리를 더욱 정합적으로 만들어줄 요소들이 소실된 제삼자의 것이 된다. 


  땀을 흘리며, "물"이라고 말하는 경우, 혹은 불이 났을 때 "물"이라고 말하는 경우에 우리는 같은 발화라도 다른 의미로 그 동일한 발화를 행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그의 발화 말고도 다른 상황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에 카톡으로 "물"이라고 보낸다면, 수신인은 어이가 없을 것이다. 뭐 어쩌라는 거지? 싶을 거다. 이처럼 목소리는 글쓰기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고, 그가 직접 증언을 하기 때문에 변조나 오인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하지만 글쓰기(에크리튀르)의 경우는 주로 그 반대다. 그의 편지에는 그의 감정이 느껴지기 힘들며, 그의 상황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물론 세세하게 다 적을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과연 편지를 보낼 때 우리는 그 당시의 모든 것을 적는가? 아마 필요한 내용만 적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부터 글쓰기는 말하기보다 열등한 것이었다. 글쓰기/말하기 뿐만 아니라 세상에 둘로 나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우열이 가려져왔다. 남자/여자, 서양/비서양 등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나뉘어왔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런 이항대립구조에 의문을 던진다. 


이항대립의 해체

  데리다는 플라톤과 반대로 에크리튀르가 파롤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파롤은 현전적이고, 그에 비해 에크리튀르가 원래의 것에서 떨어져 버렸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결국 파롤도 전하고자 하는 바를 완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결국 본질적인 것/비본질적인 것으로 나뉜 파롤과 에크리튀르는 결국 불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의 그들만의 리그였던 것이다. 


  이처럼 데리다는 서양의 전통적인 이항대립구조에 의문을 던진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결정짓는 것은 각자의 동일성과 서로의 차이 때문인데, 데리다는 동일성과 차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은 각각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부와 게임 간 형성되는 이항대립구조를 보면, 공부는 본질적인 것이 되고, 게임은 비본질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상황에서 하는 공부와 게임인지 모른다. 즉, 배경 상황은 전혀 모르는 채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다. 할 일을 다하고 게임을 하는 것일 수 있고, 다른 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 상황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공부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각각의 상황도 모른 채 우리는 그저 고정된 것인 양 절대적인 이항대립구조를 편견으로서 가지고 산다. 


  결국 데리다는 고정적인 이항대립구조에 의심을 던짐으로써 그 구조를 해체한다. 이는 소수의 타자를 해방하며,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그의 윤리학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그냥 사실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한 행위도 어쩌면 무의적에 새겨진 이항대립구조에 의해서 더 '본질적인 것'을 고른 것은 아닐까? 오늘 내가 메가커피 말고 커피빈에 온 것도 어쩌면 값이 더 비싼 커피빈이 더 저렴한 메가커피에 비해서 더 본질적이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

  칸트의 『판단력비판』이었나? 회화와 회화의 액자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액자는 회화를 담는 그릇과 같다. 따라서 액자는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액자의 모습은 액자 속의 작품에 영향을 준다. 액자가 너무 크면 작품이 작아 보이고, 액자가 너무 작으면 작품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 그리고 액자가 너무 화려하면 작품보다 더 시선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액자는 작품의 일부인가? 아니면 그저 부수적인 보조물에 불과한가? 액자와 작품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작품에 영향을 주는 액자가 과연 본질적인 것인 작품에 비본질적인지 의심이 든다.


  이항대립은 항상 비대칭적으로 타자를 배제하는 것이고, 어떠한 이항대립이 배후에 있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항상 타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식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가는 한에서, 넓은 의미에서 폭력적일 수밖에 없고, 순수하게 비폭력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비본질적인 것이 존재함으로써 그 위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마치 환자가 있어야 의사가 있고, 꼴등이 있어야 1등이 있는 것처럼. 그런데 우리는 이 비본질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혐오하고 배제한다. 따라서 해체해야 하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사이의 이항대립구조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 나쁜 것, 타자, 소수라는 파롤로 그것들을 열등하게 여기는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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