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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12. 2023

정신분석학?

프로이트, 라캉?

살바도르 달리 - "기억의 지속(1931)"

  달리는 초현실주의 사조 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에 하나일 것이다. 달리는 무의식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고, 이를 프로이트한테서 영감 받았다고 스스로 말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달리의 뮤즈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달리의 그림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달리의 예술이 표현하는 것은 진정한 초현실주의가 아니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달리는 무의식을 캔버스에 표현하기 위해서 일부러 잠잘 때 숟가락을 손에 쥐고 잤다고 한다. 그러면 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수면상태에서 기상하게 되는데, 그때 느끼는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달리는 프로이트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대중들, 예술가 그리고 일부 학자들에게는 인정을 받았다. 


  요즘에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다. 깊게는 아니고, 라캉과 프로이트 위주로 맛보기만 했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철학공부하다가 정신분석을 공부했냐면, 그 필요성을 느껴서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은 흔히 독일의 3H(Hegel, Heidegger, Husserl)의 영향을 받았고, 구조주의 철학은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최근에 크게 체감했다. 나는 구조주의 특히,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푸코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고, 그에 대한 논문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을 공부할수록,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다. "말과 사물(1966)"에서 인식론적 단절을 접하면 가스통 바슐라르를, "광기의 역사(1961)"를 공부할 때는 조르주 깡길렘을, "감시와 처벌(1975)"를 중심으로 한 중기 사상을 공부할 때는 니체의 계보학적인 태도 등 푸코라는 한 사람을 파고들수록 다른 철학자들과의 접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보다 폭넓게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선행으로 공부하고, 그다음에 푸코, 들뢰즈, 데리다를 공부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 프로이트와 라캉을 통해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다. 니체는 책도 몇 권 읽어봤고 해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의 사유의 영토가 너무 넓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철학자라서 좀 걸릴 것 같다. 그 후 데리다와 들뢰즈를 좀 다뤄보려 한다. 


정신분석학과 철학

  나는 처음에 정신분석학을 접할 때, 왜 이런 학문을 철학책에 넣는지, 그리고 이런 게 정말 학문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콤플렉스 등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은 당시의 나에게 너무 생소하며, 믿어지지 않는 이론이었다. 인간을 성욕의 화신으로 보는듯한 프로이트의 그런 시각이 너무 이해되지 않으며, 과연 이런 게 정말 학문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이론인지 의심이 갔다. 하지만 철학을 공부할수록 정신분석학은 무시할 수 없는 학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에서든 프로이트는 언급된다. 그리고 어느 철학 개론서를 봐도 프로이트는 빠지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을 나름 설명하자면, '반(反) 데카르트적'인 학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데카르트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코기토(Cogito) 명제를 떠올린다. 데카르트는 세상의 모든 것은 의심할 수 있어도 생각하는 나의 자명성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 나는 온전한 주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해체불가능한 주체의 토대를 마련해서 진리에 도달하려 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주체의 온전함을 해체했다. 


  정신분석학은 우리의 의식이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폭로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빙산의 일각'에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의 전체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가 아는 의식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고 무의식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주체는 자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에는 우리 자신이 모르는 부분도 있다. 따라서 '나'라는 주체의 자명성을 프로이트는 해체했다. 프로이트는 의식을 세 개로 나누었다.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의식인 '자아(ego)', 원초적인 본능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드(id)', 그리고 타인의 규범이 내재화돼서 자아가 바른 선택을 하도록 추구하는 '초자아(super ego)'. 우리는 '자아'로서의 본인의 모습만 알 수 있다. (사실 알 수 없지만 의식으로서 나타나니까 알 수 있다고 치자) 그리고 '초자아'와 '이드'는 무의식에 숨겨져 있으므로 알 수 없다. 


  대체 이 프로이트의 자아 삼분설이 철학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을까 옛날부터 고민을 좀 해봤다. 과거엔 그저 주체의 정신을 분할한 것만이 의미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정신분석학의 업적은 그뿐이 아니었다. 이걸 라캉의 이론을 공부하면서 느꼈다. (여기서 라캉과 프로이트의 이론을 다룰 생각은 별로 없다. 나는 여기서 정신분석학이 철학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말하고 싶다.)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 혹은 욕망이라고 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란 무의식에서 나오는데, 이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는 것이 라캉의 사유이다. 좀 비약이 심할 수도 있는데, 라캉이 말하는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가 뭔가. 세상이 공부 잘하는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성적이 높다는 것이고, 성적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시키는 대로 잘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 성공이라는 담론의 형성으로 인해서,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된다. 아니, 우리의 욕망이라고 착각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현대적 의의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이 연관성의 현대적 의의를 논하자면, 나는 소비와 성과의 주체인 현대인의 자아 성찰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많은 것을 욕망하고, 그 욕망을 채우면 허무해져서 또 다른 욕망을 채우려 한다. 저 가방만 사면 혹은 저 여자랑 만나면 행복할 텐데 등 계속 뭔가를 추구한다. 근데 과연 그 욕망이라는 게 나에게서 오는 내재적 욕망인가? 결국 그 욕망이란 타자에 의한 혹은 타자의 것에서 전이된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데카르트와 정반대의 명제를 말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은 주체의 자명성을 해체함으로써 인간 존재를 니힐리즘에 도달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지만, 일본, 프랑스 등에선 인정받은 학문으로서 환자의 치료에 이용되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처음 정신분석학을 창설할 때, 그의 목적은 환자의 무의식에서 히스테리의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은 주체를 해체했고,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 삼분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콤플렉스 그리고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는 여기서 다루지 않았다. 왜냐면 그걸 다 다루면 이 글은 브런치가 아니라 학술지에 논문으로 등재되어야 할 크기의 논문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건데, 정신분석학에 대한 내 지식은 실재계에 있나 보다. 나는 내 지식을 글이나 도식으로 표현하는 방법에 서툰 것 같다. 이 글의 독자들도 정신분석학을 단순히 사이비 과학이나 개소리로 치부하지 말고 그 의미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물론 가치판단은 본인의 역할이며 동시에 열린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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