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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05. 2023

너무나도 새파란

Blue and too blue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났을까. 아니면 내가 정말 틀린 것일까. 늑골까지 부러져버리고 결국 내 심장을 겨눈다.  늑골은 폐와 심장 같은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뼈인데 어쩌다 보호해야 할 대상을 공격하게 되었을까. 적어도 늑골만은 심장을 지켜줄 거라 믿었는데.


  이 비극마저도 결국 내 동일자가 될 질료일까? 아니면 내가 저 비극에 잡아먹혀서 그의 일부가 될까. 이 비극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나는 그 비극 안에 있다. 마치 파르메니데스가 이 세상은 하나의 '구'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이 비극의 구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난다 해도 그건 모두 환영에 불과한 것일까. 


  나 자신을 알수록, 그리고 알아갈수록 더 힘든 여정이 되어간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악마가 속인 것이라 말하는 데카르트. 그리고 내가 지각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버클리. 인간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는 칸트. 그래. 내가 감각하는 세상의 것들은 모두 현상이거나 환영이다. 아니 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코기토 명제를 말한 데카르트처럼 나는 생각하기 존재한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의 내재성을 알아갈수록, 개념이라는 폭력으로 내 차이를 도려낼수록 세상을 사는 게 힘들어지는 것 같다. 


  정말 내가 틀린 것일까? 모두가 동의라고 말할 때, 소신 있게 거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행위일까? 이 침묵의 나선에서 나는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같다. 차라리 나를 부숴라. 나를 분쇄시켜라. 그럼 내가 너를 탓하기라도 할 텐데. 지금이 비극적 사건의 피해호소인인 나는 결국 이 사건의 공범이었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다 내가 선택한 일이다. 다 내가 노력해서 일궈낸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 진술을 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훈수를 두고 비난을 가한다. 내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심장에 박힐 늑골을 과연 빼내야 할지. 아니면 침묵을 깨고 나도 동조할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존재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어야 하는데, 니체가 말한 것처럼 삶 자체를 긍정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의지와 표상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나의 욕심을 줄여야 하는데. 피해자인 나는 공범인 나와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과연 이 변증법의 승자는 누구일까. 누가 동일자이며, 위장자였을까.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미다스왕에게 잡힌 사티로스. 미다스 왕이 묻는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 "어리석은 존재여 그걸 아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태어나지 않는 것일세. 그리고 그다음으로 좋은 건 일찍 죽는 것이지." 그래 비극이란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 하지만 비극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결과와 과정에서의 '쾌' 때문이다. 그 극복과 용과 그리고 격정적인 디오니소스적 감정 때문이라는 말이다. 


니체에게 묻고 싶다. 이런 삶을 어떻게 긍정해야 할지. 

푸코에게 묻고 싶다. 이런 삶도 예술작품인지.

칸트에게 묻고 싶다. 내가 지켜야 할 정언 명령은 무엇인지.

플라톤에게 묻고 싶다. 과연 나라는 존재의 이데아는 무엇인지.

소크라테스에게 묻고 싶다. 나 자신을 알수록 비참해지는데 왜 나를 알라고 말했는지.


  그냥 개소리를 지껄이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한풀이를 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혼자 끙끙거리기는 싫다. 이 개소리마저 누군가는 비난하거나 무시하겠지만 나는 이 발화를 꼭 해야겠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닫는 순간 그냥 잊었으면 좋겠다. 오경수가 요새 힘들었구나라는 생각도 하지 마라. 그냥 글 하나 올라왔었던 것도 기억하지 마라. 


  넓은 바다에서 수평선을 향해 수영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결국 나도 사람인지라 때론 쉬고 싶다. 그리고 그만하고 싶다. 이 사유의 바다를 나의 공간으로 영토화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이 사유 때문에 너무 힘들다. 그냥 얕은 해안가에서 아름다운 수평선을 보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수평선에 도달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생각을 멈추고 싶다. 하지만 생각은 하고 싶다. 사유하고 글 쓰는 것이 행복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망치기도 한다. 이 파르마콘을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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