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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Sep 05. 2023

동일자의 언어

나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마세요.


 

에곤 쉴레의 자화상

  나는 나한테 함부로 반말하는 사람이 싫다. 아무리 나이가 지긋해도, 초면에 나에게 반말을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람취급 안 한다. 물론 선생님, 교수님, 가족의 어른들은 빼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중학교 다닐 때였는데, 그때 우리 학교는 명찰의 색으로 학년을 알 수 있었다. 1학년이던 나는 나와 다른 색의 명찰을 부착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선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니,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코기토(Cogito)처럼 굉장히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선배가 나에게 말을 먼저 걸 줄은 몰랐다. 근데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데. 근데 그 사람은 나에게 반말로 말을 걸었고, 조기 중2병이었는지 나는 그 선배에게 반항심이 들어서 반말로 응답했다. 그리고 뒤지게 욕먹고, 선배들한테 찍혔다.


  맞다. 나는 젊은 꼰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쁜 대로 다 돌려준다. 내 사람이 아닐 경우에만. 하지만 반대로 내 사람에게는 깍듯하다. 데리다가 해체하고자 한 주변부와 중심부를 난 보수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젊은 꼰대'인가 보다. 물론 나의 이런 지랄 같은 성격이 때로는 사회생활을 할 때 독이 된다. 실제로도 부모님 또래의 사람 혹은 이 이상의 연배가 있으신 분들과도 마찰을 많이 겪었다.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것을 절대로 용인할 수가 없는데, 그런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뭐 물론 반말도 한 몫했겠지만..


  무튼 나는 나한테 다짜고짜 반말하는 무례한 사람이 굉장히 싫었다. 여기서 갑자기 문장이 과거형이 되었는데, 당신은 눈치를 챘는가? 분명히 난 이 글의 처음에서 '반말이 싫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문단에서 나는 '굉장히 싫었다'라고 했다. 지금 나에게 이 문장의 시제의 전환은 단순히 현재와 과거를 구분 짓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반말에 대한 나의 사고가 완전히 뒤집혔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반말이라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말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친근함을 느낄 수도 있고, 언어를 통해 어느 정도 격식을 허물면서 더 많은 행위의 허용을 내포하기도 하며, 서로 반말을 사용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동일자임을 보증할 수도 있다. 반말을 하는 두 친구는 서로 존댓말을 할 때보다 반말을 할 때 더 서로에게 동일자이며, 같은 바운더리 안에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결국 타자에게 반말을 함으로써 그를 동일자로써 환대하는 것은 아닐까. 듣는 사람이 기분이 나쁘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다.


  오늘 대학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강의를 들었다. 박** 교수님께서 강의하셨는데, 여러 의미로 울림이 있는 강의였다. 첫 시간이라 가볍게 강의를 진행하신 것 같았는데, 좀 오바해서 말하면 나는 그 강의에서 감동을 받았다. 두 가지 의미에서 감동을 받았다. 첫째로, 교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철학자로서의 태도였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학자로서의 태도는 정말 내가 원하는 그런 것이었다. 학문을 학문이 아닌 내가 속해있는 공간과 시간을 위한 그런 철학.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 플라톤의 '국가'같은 고전을 섭렵하면 뭐 하나 그건 몇백 년 전에 어느 학자가 남긴 주관에 불과한 것인데. 고전이라는 불리는 동일자의 이론에 갇히는 철학자는 과연 멋있는가? 난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보 같다. 학부과정에서는 그렇게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는 철학을 자신의 수단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자의 사유를 펼치는 사람인데, 다른 철학자들이 몇 백 년 전에 한 소리만 계속한다면 그 사람은 과연 철학자인가? 플라톤의 철학은 기원전 시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철학이다. 그 말은 그 시대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그 시대, 그 장소의 말은 자신의 위치에서는 울림이 있는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의 주파수는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매개 삼아서 공명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가 아닌 목소리는 결코 그 자체로 공명할 수 없다.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고, 그 발화를 재현하는 철학자에게 흡수되고, 완전히 소화되어야 세상과 공명할 수 있다.


  이 태도를 나에게 적용시켜 본다면, 나는 한 명의 철학자에 갇혀서는 안 된다. 푸코의 책이 아무리 울림이 좋더라도 난 거기서 빠져나올 줄 알고, 그 사유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나는 철학자가 아니라 그저 푸코전공자에 불과한 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철학책을 읽는 이유는 그 책을 인용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나의 사유를 정립하는데 참고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오경수'라는 철학자이지, 일개의 푸코앵무새가 아니다. 나는 푸코전공자로서 세상에 존재하기보다 나의 이론이 있는 철학자이고 싶다. 아무튼 교수님께서 강의에서 말씀하신 철학자의 에티튜드에 대한 부분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로 내가 느낀 감동? 은 내 이름과 반말에서 유발되었다. 교수님께서 그냥 강의 중에 부르신 내 이름(성 빼고 이름만)은 교수님께서 의도하신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교수님께서 나를 '경수'라고 불러주시고, 반말로 대화를 하실 때, 나는 저 사람의 동일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타지에 와서 학부와 다른 공부를 하는 나는 요즘에 이 세상 그 자체의 타자로써 스스로를 인식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때에도 다른 학우들을 보면서, 난 저들에게 섞일 수 없을 것이라 스스로 단정 지었다. 그들의 표정에서 보이는 여유는 고시원에 살면서 매일 알바나 하는 나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과 같이 느껴졌고, 지방대에서 공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지어줄 수 없는 미소일 거라 생각했다. 한국외대 도서관에서 공부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그동안 나는 서울의 유수한 명문대 한가운데에서 겉도는 지방대생처럼 스스로를 느꼈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열람실 옆자리 사람이 무엇을 공부하던지 나보다는 더 대단것일 거라 단정 짓고, 그들에게서 벽을 느꼈다. 더군다나 가족과 친구들마저도 나의 공부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냥 취업이나 하라는 소리와 니가 무슨 인문학이냐와 같은 소리만 듣고 살아서 나는 세상에 고립된 존재와 같이 느껴졌다. 세상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고, 그저 타자로만 치부되던 내가 오랜만에 들어본 내 이름 두 글자를 들었다. 그 발화자에겐 그저 호명이었겠지만, 나는 그 발화가 이루어진 순간 나의 존재를 인정받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백 번 반복한다. 조교일에 알바까지 도저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심지어 강의 교재를 살 돈도 없으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왜 나는 준비도 안된 채 대학원에 진학했는가. 왜 나는 주제에 안 맞게 한국외대에 왔는가. 이런 생각들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 발화된 내 이름 두 글자가 나에게 한줄기의 빛이 되어주었다. 그 철학자의 단순한 호명에 불과한 그 발화는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더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 교수님께 정말 감사드리고, 베풀어주신 환대만큼 보답해드리고 싶다. 그의 반말은 나에게 동일자라는 훈장과도 같으며, 호명은 나에게 코기토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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