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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Sep 23. 2023

현존재와 그의 염려

Dasein und sorge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하이데거는 20세기 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동시에, 나치에 대한 논란도 있는 철학자이다. 그는 후설의 제자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하이데거가 후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철학을 했다고 본다. 후설에게 현상이란 의식 안에 주어지며, 의식에 의해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대상으로 구성되는 나타나는 것이었지만, 하이데거는 ‘현상’을 “자신을 스스로 내보임” 또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후설과 다른 이해를 보여주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현상학에 “은폐된 어떤 것을 비은폐 또는 탈은폐해서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숨겨진 그 무엇이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연구와 탐구에서 하이데거는 ‘존재’가 가장 중요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통해 자기 이전의 존재론이 가진 문제점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그동안 존재론이 존재자에 집중한 나머지 정작 존재의 의미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묻지 못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우리 자신인 현존재만이 존재에 대해 묻고 자신의 존재 이해를 바탕으로 그 물음을 좇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존재 개념의 고유성

  현존재는 '다른 그 누가 아니라 또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자신 각자가 바로 그인 존재자'이다. 즉, 누구도 대체하거나 대신하지 못하는 고유한 단수로서의 존재자이며, 그 존재의 의미나 내용이 각자 자신의 것으로 할당되고 채워지기를 요구받는 존재자이다. 따라서, 현존재란 나 자신 아닌 다른 누구, 다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자이며, 국민, 시민, 사람들, 혹자 등의 범주보다 근본적으로 앞서는 범주로서 그 무리들이 각각 자신으로 파악될 때 형성되는 존재자를 하이데거는 현존재라고 부른다. 따라서 나는 현존재를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개체'라고 이해한다. 현존재란 다른 개념이나 소속으로 이해될 수 없는 즉, 상위개념이 없는 토대로서의 존재가 아닐까?

   가위는 무언가를 자르기 위해서 존재한다. 즉, 가위는 인간의 행위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 가위는 인간이라는 상위개념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가 토대가 되지 않으며, 인간이 그 토대가 된다. 따라서 가위는 현존재일 수 없으며, 현존재를 위한, 현존재에 의한 도구 존재이다.


  현존재는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는, 물음이라는 존재 가능성을 가진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사물이나 도구의 존재 방식이나 의미를 ‘손안의 존재’라 칭하고, 이론적이거나 학문적 연구 대상의 존재 방식이나 의미를 ‘눈앞의 존재’라 칭했다. 그리고 존재의 물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이 물음을 제기하는 우리 자신인 존재자의 방식이나 존재 의미를 ‘현존재’라 칭했다.

  이때 '손안의 존재'란 앞 문단에서 언급한 가위와 같이 도구로써 존재하는 존재를 예로 들 수 있고, '눈앞의 존재'란 공부의 대상이거나 탐구의 대상인 무언가를 칭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내가 물리학자라면 나에게 초전도체는 눈앞의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와 전혀 상관없는 바리스타나 세일즈맨이라면 나에게 초전도체는 눈앞의 존재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게 연구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는데, 거시적으로 본다면 생물 종 중에서 인간만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모든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성차라고 반성할까. 따라서 모든 인간이 현존재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재를 사유할 수 없는 존재의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멀쩡한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에게 대해 염려하지 않으면 나는 그를 현존재라고 볼 수 없다고 본다. 


  현존재는 '그 존재자가 각자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자기 것으로 해서 존재해야 하는 데 근거를 두는 존재자'이기도 하다. 현존재는 그에게만 고유하게 허락된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해서 살아나가야 하는 존재자이지만, 사물들은 순수하게 이론적인 시야에서 파악되어 연구 대상으로 취해지는 방식으로 나름의 ‘고유한 존재’로 존재할 뿐이다. 이 세 번째 특징에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자라는 점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삶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Ja(Yes)"라고 답할 것이다.


실존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언제나 어떻게든 관계 맺고 있는 존재 자체”를 실존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그 관계 맺음의 방식은 이렇게 혹은 저렇게 달라지겠지만 현존재가 관계하는 존재 자체가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고 이를 하이데거는 ‘실존’이라 부른 것이다. 도구나 사물은 자신들의 존재나 있음을 문제 삼을 수 없는 존재자들이다. 이때 ‘문제 삼는다’는 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늘 고민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심지어 걱정한다는 것, 하이데거식 용어로는 염려한다는 것이다. 오직 현존재만이 불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안은 더 이상 저주의 징후가 아니라 달리 살아갈 수 있다는,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상징일 수도 있겠다.


  현존재의 본질적인 존재 규정인 각자성, 실존성 등은 현존재의 선험적 구조로서의 ‘세계 안에 있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현존재는 ‘거기 있음(Da sein)’으로 규정되는 존재자인데, 하이데거는 ‘거기’를 ‘세계’라고 단언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 안에서가 아니라면 우리 각자가 현존재가 되고,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는 현존재가 되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자기의 것으로 존재해야 하는 바로 그 현존재가 가능하지 않다.


  우리인 현존재는 ‘세계 안에 있을 때만’ 다른 존재자나 현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세계 안의 존재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계 맺음 방식 또는 존재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때 핵심은 현존재가 누구와 함께 또 무엇과 함께 마주하고 살아가느냐의 방식에 따라 이 세 가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배려(besorgen)가 있다. 배려는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위해, 또 그것 때문에 손 안의 것과 눈앞의 것과 관계 맺는 방식 또는 그 존재 양식을 말한다. 배려는 현존재와 ‘현존재가 아닌 존재’와의 관계이며, 결국 현존재 자신을 위한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일까? 만약 내 이해가 맞다면 도구와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로 심려(füsorg)가 있다. 이는 현존재가 또 다른 현존재적 존재자와 관계 맺는 방식 또는 그 존재 양식을 말한다. 즉, 인간인 나 자신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세 번째로 염려(sorge)는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와 관계 맺는 방식 또는 그 존재 양식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 즉,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서 나는 이 존재 양식이 현존재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사물은 그 자신에게 자신의 존재가 문제 또는 물음이 되지 않는다. 그것의 본질은 그것을 만든 인간이 규정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존재에게는 그 자신의 존재가 각자에게 떠맡겨진 셈이다. 그런데 그 각자 떠맡은 존재 부담이라는 짐은 진공이나 백지상태에서 짊어져야 할 어떤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인 현존재는 철저하게 항상 이미 “내던져져 있음”을 견뎌야만 한다. 이미 우리는 어느 정도 우리의 선택이나 결정과 무관하게 우리의 실존에 영향과 힘을 끼치는 세계 속에 내던져진 것이다. 이미 내던져진 그 지점에서 자신의 존재 부담을 고스란히 져야 할 존재자가 바로 현존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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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현존재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원하지도 않은 이 세계에 내던져서 한 치 앞을 모르는 미래를 직면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인 염려로 인해서 현존재는 불안한 것인가? 아니면 현존재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인가? 하이데거는 이 불안을 얘기할 때 죽음을 주로 언급한다. 과연 죽음 앞에서도 그 대상이 중요한가? 만약 죽음 앞에서 그 존재에게 내 의식이 지향성을 잃는다면 아마 그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죽음 앞에서도 내 의식의 지향성이 그 대상을 향한다면 아마 그건 나의 본질과 같이 중요한 것일 거다. 즉, 우리는 불안을 통해서 진짜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식별할 수 있을 거다. 만약 지금 당장 위험한 상황에 닥친다면 아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외한 지갑이나 스마트폰을 챙기기보다 우리 자신의 육체를 탈출시키는데 급급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불안한 상황에서 결국 우리 자신 외의 것들은 부수적인 것이며,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볼펜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볼펜은 그저 글씨를 쓸 때 쓰여지기만 하고, 다른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용도로 쓰일 가능성도 적다. 하지만 현존재는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원동력 삼아서 자신의 존재 방식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방식을 바꿀 자유와 본질이 고정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불안을 느끼지만, 반면에 더 나은 존재 방식을 고민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은 피투에 의한 불안과 그 불안을 매개삼아서 행하는 기투로 인해서 지금과 같이 진화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이 현재 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자이자, 가장 고등한 존재자가 아닐까? 불안은 우리에게 독이지만, 때로는 약이 되는 파르마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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