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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Sep 25. 2023

누가 철학자를 죽였는가

철학자의 변명

카라바조 -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07)

  철학자라는 직업에 대해 현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주변에 철학과에 다닌다고 말하면 졸업해서 철학관 차릴 거냐는 농담 섞인 질문을 많이 듣는다. 카더라에 의하면 철학과 친구한테 사주를 봐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나는 철학과를 다니면서 전자의 경우는 많이 있었는데, 후자의 경우는 드물었다. 만약 누군가 사주를 봐달라고 하면 나는 서양철학전공이라 그런 거 모른다는 식으로 잘 넘어갔다. 과거에 철학자들은 현대와 같이 취급받지 않았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은 대중들에게 헛소리하고, 뜬구름 잡는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한 나라의 군주를 교육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철학자가 그 권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과학의 발전 때문일까? 원래 한 뭉텅이로 존재하던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자연철학이라 불리던 분과학문이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독립하고, 사람의 영혼과 내면에 대한 부분은 심리학으로,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부분은 정치학으로 분류되어 철학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굵직했던 철학이라는 학문이 과거보다 많이 가늘어졌다.


  또한 자본주의의 도래와 산업화로 인해서 노동이 중시되면서 사유에 대한 중요성이 사회 내에서 많이 퇴화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체감도 안되고, 잘 모르지만, 과거에는 대학에서 인문학이 결코 홀대받은 전공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인문학보다 실증주의적인 이공계나 의과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더 희망하기 시작했다. 왜 그럴까?

 

  우선 인문학에 대한 담론이 그 이유이다. 인문학을 배워서 뭘 하냐. 무슨 자격증이 나오냐. 차라리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어라. 인문학을 전공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흔히 이런 반응들을 볼 수 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들로부터 우리는 사회가 혹은 대중이 인문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예상할 수 있다. 인문학을 한다는 건 현재의 언어로 말하면 뜬구름 잡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유용하지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일까? 이러한 담론들이 사람들이 인문학을 접하고, 그것에 뛰어드는 것을 막는 것 같다. 세상은 한가롭게 커피 마시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철학자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는 개개인이 소득을 창출하고, 그 조직이나 집단에 유용한 인재를 원한다. 그런 면에서 인문학도보다 공학도가 권력자들에게 선호된다. 인문학자들은 돈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다. 하지만 공학자들은 과학과 경제학 사이에서 이윤을 효과적으로 내는 일종의 사업가들이다. 그런 면에서 공학자들이 인문학자들보다 소득이 높은 것은 당연하고, 대중들에게 보다 더 선망의 대상이 된다. 이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돈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학문의 헤게모니가 바뀐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철학의 경우 그 진입장벽이 높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유튜브에 간결하고 쉬운 강의 영상들도 많이 올라오고, 좋은 개론서들이 많아서 과거보다는 입문하는 것이 쉽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들을 시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 순수이성비판, 정신현상학, 존재와 무, 광기의 역사, 지각의 현상학 등 철학작품들의 제목은 이름만 봐도 어려워서 읽기가 싫어진다. 나의 경우는 짬밥이 좀 차다 보니까 그 책을 읽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이미 알고 있으며, 초보자보다 숙련된 독자이기 때문에 저런 책들을 시작하는 데에 부담이 적다. 하지만 인문학을 배우지 않았고, 아예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저런 책들을 보면 다섯 페이지 만에 덮고, 포기한다. 게다가 요즘 트렌드는 유튜브, 쇼츠, 틱톡과 같은 영상매체 특히 1분을 넘기지 않는 짧은 영상이기 때문에, 몇 백 페이지짜리 철학책은 트렌드에 맞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은 현시대와 다른 자신 만의 개썅마이웨이를 묵묵히 걸어간다.


  결국 철학은 철학자를 위한 철학일 뿐, 대중을 위하지 않는 것 같다. 현학적인 용어와 방대한 분량으로 학자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할 뿐, 대중들이 접하고 싶어 하는 책은 아닌 거 같다. 학문을 위한 학문은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근친혼을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아무리 그들이 뛰어나도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이지 않으면 그들 자신이 아무리 훌륭해도 존속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작금의 학문상황이 딱 그런 것 같다. 그저 학자를 위한 학문이며, 새로운 뉴비에겐 너무나도 진입장벽이 높은 그런 것.


  하지만 모두가 학자를 위한 학문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오분뚝딱철학, 충코의 철학, 지혜의 빛과 같은 유튜버들이나 다른 많은 크리에이터들은 인문학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감으로써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창발 한다. 나의 경우도 그런 루트를 통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과연 나는 지금처럼 글을 쓰고 사유할 수 있었을까 싶다. 몇몇 사람들은 미디어의 발달이 철학과 문학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나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오히려 학문을 미디어에 녹여냄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그 씨앗을 퍼뜨리고, 더 많은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델포이의 신탁을 받고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를 확인하러 지혜롭다 여겨지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였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깨닫는다. 아. 나는 최소한 내가 뭘 모르는지는 아는구나. 그래서 내가 저들보다 지혜롭구나.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주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라 여기고, 사람들에게 산파술을 통해서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모습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멜레토스와 몇몇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신을 부정하고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젊은 이들을 망친다는 명목하에 사형을 선고받게 한다.


  누가 소크라테스를 죽였을까? 그건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일까? 혹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을 것이 두려운 한 존재자일까. 그렇다면 이 시대에 철학자는 누가 죽였을까? 과학자는 아닐 거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학문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시민들이 깊게 사유하지 않고 순종하며 그저 돈이나 잘 벌어서 세금을 착실하게 내기를 바라는 누군가는 아닐까.


  어쩌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몰락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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