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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Nov 01. 2023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요지경 현대예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 <No.5>(1948)

  아는 형이 말했다. 현대미술은 그저 부자들의 재테크 수단이라고. 작품을 감상하는 건 좋아하지만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당시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실주의에서 초현실주의를 거쳐서 어떻게 추상 표현주의까지 왔는지 감성으로는 아는데, 이성으로 설명할 능력이 없었다. 아직도 부족하고 모르는 게 많지만 이제는 그 얘기를 할 때가 온 것 같다.


  대중들은 현대미술을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기에 그들은 친해지기 어려워 보인다. 인상주의 그림은 그 자체로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명하게 드러나며,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그 작품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섬세한 묘사와 붓터치는 작가가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본기 연습에 투자했는지 실감 나게 해 준다. 벨라스케스, 라파엘로 그리고 조각에서는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작품은 작품인지 논할 필요가 없이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몇 백 년 전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그래도 내가 21세기 지성인인데, 현시대의 미술작품에도 관심을 좀 가야 져하지 않겠는가?" 이런 마인드로 막상 현대미술을 접하면 과거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시대의 예술작품과 너무나도 다른 현시대의 예술이라는 것 앞에서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 것이다. 대체 왜 물감을 대충 휙휙 던진 것 같은 저 페인트 덩어리(잭슨폴록 - no.5)가 작품인지 알기 위해선 미술이 어떤 변화를 겪어서 현재까지 존재했는지 계보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 <인상, 해돋이>(1872)

물감, 기차 그리고 카메라

  대표적인 인상주의 작가로 모네, 마네, 시슬리, 르누아르와 같은 예술가를 들 수 있다. 그들이 인상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당시 그들은 제도권 미술가가 되기 위한 관문인 살롱전에 낙방한 제도권 밖의 예술가들이었다. 그래서 그들끼리 따로 전시회를 열게 되는데, 살롱전에 낙방하지 않은 제도권 예술가들이 그들의 그림이 벽지에 묻은 페인트 같아서 인상적이라고 말해서 인상주의가 그들 사조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그들이 왜 제도권 밖에 놓이게 되었냐는 점이다. 인상주의는 당대 미술계에 있어서 반항아와 같았다. 그 당시의 올바른 예술은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은 고전주의에 입각한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고전주의에서 벗어난 예술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고전주의에서 탈피했는가?


  고전주의 미술은 화가의 아뜰리에 안에서 이루어지며,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보이는 대상 그 자체를 그대로 화폭에 담으려 했다. 그래서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고전주의 미술에서 모델은 장시간 같은 포즈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작가는 미세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반면 인상주의 미술은 그 작업장소가 화가의 아뜰리에 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여기서 인상주의 미술이 두 가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건 튜브형 물감의 발명과 기차의 보급이다. 튜브형 물감의 발명으로 물감을 소지할 수 있게 되어 공간적 제약을 덜 받게 되고, 산업혁명으로 인해 보급된 기차가 화가들이 다양한 풍경을 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인상주의 미술은 고전주의 미술처럼 보이는 대상 그 자체를 묘사하려고 씨름하지 않는다. 인상주의 미술은 대상이 내 망막에 맺히는 현상을 포착하여 그 현상을 화폭에 남기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대상 혹은 물자체가 아닌 내 주관적인 경험이나 현상을 묘사한다. 이 순간은 길지 않다. 가령 해는 저물고, 세상의 색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한다. 따라서 인상주의는 고전주의와 다르게 하나의 대상을 섬세하고 집요하게 묘사하기보다 보이는 대로 슝하고 그린다. 그래서 그들의 붓터치 흔적은 찾기 쉬우며, 키아로스쿠로(명암대비)는 기대도 안 하게 된다.


  과거에는 사물 자체의 영원한 모습 그 자체를 묘사하는 것 만이 미술이었다. 하지만 인상주의가 시발점이 되어서 미술은 더 이상 대상 자체가 아니라 화가의 주관적인 현상을 묘사한 작품 또한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자체와 현상이라. 왠지 칸트 철학이 생각난다.


과거의 화가들은 사물을 ‘있는 대로’ 그렸다. 반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 그렸다. 과거의 화가들이 ‘객관’을 지향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관’을 지향했다. 과거의 화가들이 ‘대상’을 그렸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대인의 ‘시각’을 그리려 했다. 모네는 수련을 그린 게 아니라, 도시인의 눈에 비친 인상을 그렸다. 모네가 그린 것은 수련이 아니다. 모네는 결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모던의 지각을 그렸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3』, 39p


  인상주의와 고전주의 화가들의 대결에서 우리는 사물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빌런이 나타나서 그 형태들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그 빌런은 바로 '카메라'이다. 카메라가 등장하자 화가들은 더 이상 보이는 것을 그대로 묘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장시간동안 작업해서 뭐 하나. 셔터 한번 누르면 여러 장도 인화가 가능한데. '카메라'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진 빌런의 등장으로 화가들은 자연주의적 재현의 역할을 빼앗기게 되었다. 


19세기에 카메라가 발명됨으로써 사진이 세계를 재현할 의무를 떠맡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사물의 영원한 상을 담은 회화가 아니라, 순간적 인상을 낚아챈 사진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본다.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 넘겨준 회화는 이제 눈에 보이는 ‘존재자’를 재현할 의무에서 벗어나, 점점 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근원적 ‘존재’를 현시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클레의 말대로 “현대 회화는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3』, 60p


  그 악당의 등장으로 화가들은 더 이상 풍경화나 초상화 같은 일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화가들은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을 그리게 된다. 어쩌면 이 악당의 등장이 현대미술을 요지경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작품 속 대립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하여 인간의 정신을 세 개로 나눈 것처럼, 진중권 아저씨는 작품이 주는 정보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미적 정보', 나머지는 '의미 정보'이다. 미적 정보는 우리에게 언어적인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저 미적인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 반면 의미 정보는 우리에게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의미 있는 정보를 준다. 이때 이 두 정보는 한 작품 안에서 공존한다.


  고전주의 미술까지 우리는 예술 작품에서 미적 정보뿐만 아니라 의미 정보까지 읽을 수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면 우리는 작품에서 미학적 쾌감을 얻기도 하며, 동시에 붓을 들고 있는 저 남자가 화가인 벨라스케스이며, 가운데의 여아가 마르가리타 공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미적인 작품을 통해서 붓터치와 같은 미적 정보뿐만 아니라 묘사한 인물이 누구이고, 어떤 상황인지를 알게 해주는 의미 정보를 함께 알 수 있었다. 이때 의미 정보와 미적 정보는 조화를 이루며 균등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이 둘이 싸웠는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미적 정보는 방대해지고, 의미 정보는 사라져 간다. 분명히 미적인 정보는 준다. 울트라 마린을 통해서 파란색을 표현했군.. 삼분할이 마치 로스코와 같다.. 등.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묘사한 것이며,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한다. 고전주의에서 현대미술로 넘어오면서 미(美)의 총량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조화는 과거와 같지 않음이 자명하다. 따라서 대중은 현대 미술을 보고서 의미 정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저게 뭘 그린 건가.. 당황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나? 우리가 예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재인식함으로써 얻는 쾌감이라 한다. 그런데 현대 예술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을 재인식하지 못하며, 오히려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예술이 어려운 이유

  현대 예술이 어려운 이유는 미적 정보가 의미 정보를 초월한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는 그 작품이 닫힌 작품이 아니라 열린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예술에선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에 문을 열어놓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제 예술 작품은 완성품의 형태로 독자에게 배달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은 열려 있다. 이런 특징을 움베르토 에코는 ‘개방성’이라고 부른다. 열린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일률적으로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독자는 작품 속에 들어가 작품을 스스로 완성하는 가운데, 거기서 무한히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움직이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진중권,미학 오디세이 2』, 271)."


  우리가 가진 예술의 편견이 어쩌면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데 장애물일 수도 있다. "예술은 이래야 한다"와 같은 꼰대적 담론과 편견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닫아서 새로운 예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적 정보가 의미 정보를 초월하고, 더 이상 보이는 것들을 재현하는 의무를 저버린 예술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는 현대 미술을 보고 그 작품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니라, 어쩌면 예술의 맥락 속에서 그 역할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아는 지식을 재인식하기 때문에 쾌를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처럼.


  그래서 현대 예술과 친해지고 싶으면 예술사를 전반적으로 훑는 것과 미학을 공부하는 것을 추천한다. 미학은 굳이 안 봐도 되는데, 예술사를 이해하다 보면 왜 잭슨 폴록의 그림이 비싼지 왜 세잔의 구도는 저 모양인지 납득이 될 것이다. 


  결국 현대 예술 그 자체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 맥락 속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은 혼자서 세계를 열 수 없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그저 물감덩어리로써 대지일 뿐이다. 그 작품 속에서 대지와 세계가 투쟁하며 공존하기 위해선 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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