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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Oct 31. 2023

갈등, 대립, 충돌

포스트모더니즘과 이항대립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 <Abstraktes Bild 747-1>(1991)

  철학사, 미술사 등 어떤 학문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다 보면 이들이 어느 두 의지 혹은 개념의 대립의 역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현실과 이데아,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물자체와 현상 등 대립적인 요소들은 항상 서로의 짝이 있었다. 철학사에서 칸트 이전에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로 나뉘었지만,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이 둘을 합친다. 헤겔식으로 말해서 변증법적으로 동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대 철학에서 다시 이항대립구조가 형성된다. 헤겔은 칸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고, 쇼펜하우어는 반대로 생각했다. 


  대립적 구조는 근현대에 발명된 체계가 아니었기에 고대에도 있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인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전자는 세상은 계속 변화한다고 주장했고, 후자는 그건 모두 감각의 기만이며, 사실 세상은 변화하지 않고 정지해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대립적 구조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변증법을 통해서 절대정신에 도달할 순 없지만, 반대 세력을 통해서 발전하는건 가능하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과의 대립 외에도, 인간과 인간 간의 갈등은 인간을 더 나은 인간으로 진보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혹은 인권침해와 같은 부도덕한 행위들은 정당하지 않지만. 하지만 우리는 대립적인 무언가가 있기에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 혹은 그것을 흡수하기 위해서 투쟁할 수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기고 싶은 라이벌이 있기 때문에, 아직 갖지 못한 물건이 있기에, 아직 알지 못한 지식이 있기에 인간은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경쟁도 일어나고, 동료가 생기기도 한다. 


  이 대립적 구조는 정치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야당과 여당,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친일과 종북, 친미와 친중,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 정치계에서 이항대립적 구조는 찾기 쉬우며, 극단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정반합에 의해서 하나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으며 자신의 세력을 유지한다. 한 정당이 180석을 차지하더라도 반대쪽 진영은 살아있다. 그리고 여당의 자리를 빼앗겨 야당이 된 당도 어떻게든 살아있다. 물론 정치는 두 개의 세력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크게 보자면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로 볼 수 있다.


  이항대립관계에 의해서 둘로 나뉜다는 것은 그들 간의 위계질서를 만들기도 한다. 정상인과 비정상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일반대학과 사이버대학, 말하기와 글쓰기, 오프라인과 온라인. 전자는 후자보다 위의 계급에 있을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세상이 핑계를 대며 전자가 더 우월하고 후자가 열등하다고 취급한다. 그래서 정상인들은 비정상인들을 교화시켜 정상인으로 만들고, 글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기보다 직접 말해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걸 선호한다. 


  모더니즘을 이항대립구조의 발견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항대립의 해체를 주장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는 대표적으로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있다. 이들은 중심부와 주변부, 이성과 광기,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했다. 그래서 소수자 혹은 약자로 취급되는 사회의 타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정상과 비정상, 멀쩡한 사람과 미친 사람, 이성애자와 성소수자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려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꾼 것일까? 그들의 철학은 소수 혹은 타자들의 뮤즈였다. 그래서 그들은 무작정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그 경계를 허물려했다. 나 또한 그들의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도 그저 유토피아일 뿐인가. 그런 이항대립의 해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치 마르크스가 꿈꾼 사회주의 유토피아처럼 모두가 평등하고, 위계질서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말대로 세상의 이항대립이 해체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모든 기준이 사라진다. 광기와 비이성에 빠진 사람의 사회적 권리를 복권해 줄 뿐만 아니라, 모든 경계가 그 논리에 의해서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들은 광기와 비이성의 경계를 해체할 뿐 그 후의 혜안을 주지 않는다. 너무나도 이상적인 꿈의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말 그대로 그건 꿈일 뿐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막상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만, 그 무너진 질서 후에 닥칠 혼돈에 대한 대책이나 대안이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상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분명 필요하다. 소수자의 목소리도 들어야 하며, 그들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거에만 맹목적으로 몰입하다 보면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서 무정부상태와 같은 혼란이 온다는 것이다. 이게 포스트 모더니즘 열풍이 끝난 이유일까? 그들은 권력의 해체를 주장하고, 자신의 권리에 대한 복권을 보장했지만, 세속적인 세상에서 완전한 해체란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이항대립 구조는 유지된다. 만약 인류에게 있어서 이항대립구조가 아예 사라진다면 그건 평화가 아니라 종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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