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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Oct 11. 2023

플라톤의 『국가』

이상국가와 철인정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1511)' 中 플라톤

  이전의 글에서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설파하는 사상과 진, 선, 미에 대해 다루었다. 진(眞)에서는 인식론적 관점을 통해서 이데아에 대해 논했고, 선(善)에서는 윤리적, 정치적 측면에서 그가 생각하는 이상국가와 철인정치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리고 미(美)에서는 '침대의 이데아' 설화를 통해서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플라톤이 원하는 이상국가의 모습은 현재의 국가와는 전혀 다르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국가는 철저히 국가를 위해서 국민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혈연이란 의미 없는 것이며, 지극히 사적인 섹슈얼리티에 까지 국가가 관여한다.


  플라톤은 왜 전체주의적인 혹은 공산주의적인 국가를 꿈꿨을까? 우리는 그의 사유를 접하고 마냥 정신 나간 소리라며 비난하기 전에 그 사유가 촉발된 계기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먼저 그는 명예체제, 과두체제, 민주체제, 참주체제를 잘못된 국가 체제라고 비난했는데 왜 그랬을까?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했다. 그 이유는 국가의 젊은이들에게 유해한 사상을 퍼뜨리고,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신을 섬겼다는 이유다. 따라서 그는 재판장에 서게 되었고, 최후의 변론을 행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결국 사형되었다.


  플라톤은 이 일을 계기로 민주주의를 부정하게 된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철인인 자신의 스승이 저 무지한 인간들의 멍청한 투표로 인해서 사형을 당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각에 현혹되지 않고, 이데아를 지각할 수 있는 존재인 철학자가 국가의 지배자가 되어 우매한 국민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비록 그 방법이 민주적이지 않아 보일지라도,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에서 모두에게 기회를 줬다. 철저한 능력주의 사회를 통해서 그는 피라미드의 맨 위에 철학자를 앉게 했고, 맨 위에 도달하기 위해서 많은 시련들을 구상해 놨다. 그리고 그 시련에서 낙방하면 수호자 혹은 노동자가 되게끔 국가 시스템을 구상해 놨다.


  이쯤에서 누군가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데, 잘난 부모덕을 보는 금수저가 고대에도 있지 않았을까?" 참고로 플라톤도 금수저였다. 심지어 그는 잘생기고, 똑똑하며, 운동도 잘했다. 놀랍게도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부모의 덕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어른이 부모이고, 모든 아이가 자녀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잘 모른다면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냐고 당황할 것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아내와 자녀를 공유했다. 따라서 오늘은 내 아내였던 저 여자가 내일은 저 친구의 아내이고, 어제는 저 형님의 아내였다. 그리고 저 형님의 아내는 어제 내 아내였다. 21세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막장 플롯 같지만, 2500년 전 플라톤은 진지하게 이러한 가정관을 내세웠다.


  아내와 자식을 공유함으로써 국민들은 특정 누군가를 편애하기보다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한다. 결국 이는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게 되고, 이는 능력으로 개인을 평가하는 가치관을 형성한다. 따라서 가문의 재력이나 권력과 같은 뒷 배경은 현재와 같이 개인의 인생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철인정치를 주장했다. 철학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소크라테스의 처형과 같은 사태를 다시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철학자를 지배층에 놓으려는 것일까? 결국 플라톤은 철학자를 최상위에 놓음으로써 그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데아라는 이론을 통해서 그들을 분별해 내고, 이데아의 지각을 철학자의 자격으로 놓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데아란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형상이다. 플라톤도 인간인지라 그 형상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사적인 언어로서 이데아를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플라톤의 이데아를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국가는 과연 사이비와 같은 지도자들을 가만히 둘까?


  어쩌면 플라톤의 국가론은 사이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데아라는 아무나 감각할 수 없는 신내림을 받은 자가 집단을 통치하고, 권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나는 느낄 수 없는 것인데, 저 사람은 자꾸 느낀다고 하면 아마 나는 저 사람을 미친놈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권력자라면 나는 이 기울어진 관계에서 전적으로 그를 옹호할 것이다. 그리고 다수가 그것을 느낀다고 말한다면 나는 아마 나도 느낀 척을 할 것이다. 결국 이데아라는 플라시보를 느끼기 위해서 모두가 그것을 신봉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게 사이비와 다른 게 무엇일까.


   이 글에서 2500년에 어느 위대한 철학자 구상해 놓은 영향력 있는 사유를 2023년에 어느 현존재가 비판하고 있다. 과연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도 이런 크리틱이 가능할까? 전혀 불가능하다. 그의 이상국가에서 언론은 통제되고, 예술은 검열되며, 오로지 국가가 허락한 것만 향유하고,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들은 나라에서 추방되어야 하며, 예술가들은 가상을 만들 만 안 된다. 또한 이데아만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검열을 통해서 플라톤은 국민들이 오로지 바른 것만 보고 바른 생각만 하게 되어 국가가 부강해질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 부강함의 대가로 자유와 예술을 죽였다. 과연 이런 국가가 실재한다면, 정말로 부강할까? 나는 아닐 것 같다.

   헤겔은 역사철학을 논할 때 변증법을 말한다. 즉, 명제가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을 반론하는 명제가 있을 텐데, 이 둘이 하나가 되어 더 나은 명제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과연 이 변증법적 발전이 가능할까 나는 의심이 든다. 물론 헤겔이 절대적으로 맞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헤겔 이후로 헤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만큼 그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따라서 헤겔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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