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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Nov 02. 2023

에곤 쉴레

거울 왕자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

 에곤 쉴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거장이자 클림트의 제자이다. 그는 철도 역장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기차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에곤 쉴레의 일대기와 작업을 엿볼 수 있는 <에곤 쉴레 : 욕망을 그린 그림>이라는 영화도 개봉했다. 에곤 쉴레 역을 맡은 배우가 실제 에곤에 비해 너무 잘생긴 점이 인상적이었다.

 에곤 쉴레는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적응을 잘하지 못하고, 말이 별로 없었고, 소심했다고 한다. 그림과 운동 외에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 없었다.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과 수업을 같이 들을 정도로 학업성취도 또한 별로 높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매독 환자였고, ‘에빌라’라는 그의 누나는 선천성 매독으로 일찍 죽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누나를 잃었다고 에곤은 항상 믿었다. 그리고 에곤 쉴레의 아버지는 그가 고등학생 나이쯤에 죽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이것 때문에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거기다 가난한 형편으로 미술에 대한 진로에 대해 어머니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러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의 그림에서 어머니라는 캐릭터는 거의 부정적으로 표현되었다. 반면 여동생 게르티 쉴레(Gertrude Schiele)와는 이상하게 친했다. 근친적인 성향의 관계였다는 주장이 있다. 그 근거는 16세에 에곤쉴레는 4살 어린 그의 동생과 가출을 하고 호텔에서 묵었기도 했고, 동생을 누드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는 사실들이 있다.


 1906년에 집안의 반대를 이기고 ‘빈 예술 아카데미’에 진학했다. 이 학교에 대한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에곤 쉴레보다 1살 어림)가 이 학교에 지원했는데 2번이나 떨어졌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그림에 상당히 재능이 있었다. 히틀러의 사실주의 묘사 작품들은 아주 훌륭하다. 유태인을 학살하는 전쟁광이 디즈니를 그렸다니 아이러니하다.(무섭고 소름 돋는다.) 이 정도 실력이면 합격해도 될 텐데, 참 아쉽다. 억눌린 삐뚤어진 욕망이 전쟁으로 해소될게 아니라 예술로 표현되었다면 히틀러는 전쟁광보다 화가로 성장했을 텐데.

히틀러의 작품

 에곤 쉴레는 석고 소묘보다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에서 그의 재능을 드러낸다.  그래서 학교 다닐 적에 선생님에게 데생이 별로라고 지적을 받기도 했다. 보수적인 학교 교육에 질린 에곤은 3년 후에 자퇴를 하고 새로운 예술 그룹을 만든다.


 1907년에 에곤은 그의 귀인인 구스타브 클림트를 만난다. 클림트는 에곤 쉴레에게 “저는 재능이 있나요?”라고 질문하자 클림트는 그를 아주 칭찬하고 오히려 본인보다 낫다는 식의 표현을 한 것을 보아 아주 총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을 사줄까? 내꺼랑 바꿀래? 와 같은 말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델도 지원해 주고 모델비도 대신 지불해주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모델은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발리이다. 발리는 원래 클림트의 모델이었으나 클림트가 에곤쉴레에게 소개해주었다. 덕분에 에곤이 1909년에 어느 한 국제전에 출품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 전시회에는 반 고흐, 고갱과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도 많이 참가하였고, 마티스, 피카소와 예술가들을 이곳에서 처음 봤다고 한다. 이 전시회에서 예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전시회에서 에곤쉴레의 천재성이 일부 인정받기도 했지만 “병든 뇌의 기형을 보여준다”는 악평을 들었다. 이 전시회와 같이 유럽의 많은 전시회에 출품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 바로 클림트이다. 재능 있는 후배의 앞길을 막거나 악용하는 일부 예술가와 달리 재능 있는 후배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는 클림트는 정말 멋있다. 에곤 쉴레가 클림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유명할 수 있었을까?


  에곤 쉴레는 거울 왕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왜 거울 왕자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사 다닐 때도 어머니가 선물해 준 자신의 거울을 꼭 챙길 정도로 그 큰 거울에 애착이 많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자아도취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한다. 자신의 포즈를 스케치로 남기는 것도 좋아했고, 거울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지 많이 신경을 썼다. 포즈, 표정, 제스처를 배우처럼 정말 많이 연구했다는 말이 있다. 


 쉴레의 나르시시즘 성향은 자신의 자화상에서도 볼 수 있다.

<인상을 쓰고 있는 자화상>(1910)


이런 마른 체형이면 콤플렉스가 있을 수도 있는데, 쉴레는 오히려 더 왜소하게 과장된 표현을 한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그의 친구 뢰슬러는  쉴레가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했는데, 그의 자화상에서 그는 정말 당당하고 , 자아도취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자신의 나체는 가장 순수한 모습,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데 가장 중요한 효과적인 도구였다고 볼 수 있다. 몸, 표정, 포즈를 통해 자신의 표출되지 않는 내면의 실체를 드러냈다는 평가도 있다.


<이중 자화상>(1915)

지킬 앤 하이드를 연상하는 이 그림은 프로이트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자화상>(1915)

  자기 자신을 이렇게 추한 누드로 표현한다는 것은 상당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나 이렇게 나약해”, “나 이렇게 추한 인간이다.”, “난 불안하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더 강하게 표현했다.

  에곤 쉴레는 표정, 포즈에서 모든 것을 표출해서 내면의 모습까지도 감상자에게 거리낌 없이 표현해 주는데, 쉴레의 이런 모습은 개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많은 인간들의 추한 모습을 우리 대신에 표현해 주기 때문에 우리가 에곤 쉴레의 자화상에서 큰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닐까?


에로티시즘

  쉴레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부르주아들의 퇴폐적인 문화, 사회전반적으로 걸쳐있는 매춘문화가 엄청나게 많은 매독환자를 만들었다. 당시 매독은 빈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사회적인 문제였다.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은 에곤 쉴레는 성욕은 누구나 가진 것이고, 본인의 성에 대한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성은 자칫 잘못하면 죽음으로 갈 수 있는 정말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과 달리 그는 그렇게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1912년 노이렌바흐에서 미성년자 소녀들을 그렸다는 소지로 체포되었다. 그의 누드모델로 섰던 빈곤층 소녀들 중 한 명이 그를 고발했고, 경찰이 증거를 찾기 위해 그의 스튜디오에 갔을 때는 100점이 넘는 포르노그래픽적인 그림을 찾았다고 한다. 재판에선 아이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에 에로틱한 그림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유죄로 보았다. 재판 도중 판사가 그의 그림 한 점을 직접 촛불에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는 재판을 위해 21일간 유치소에 보냈고 유죄 판결로 3일간 투옥됐다. 3일간 감옥에 있는 것의 불편함에 관한 12점의 그림을 그렸다.


두 뮤즈

<발리 노이질의 초상화>(1912)

발리 노이질(Wally Neuzil, 1894~1917)

  에곤의 그림을 파는 일도 도왔던 발리는 에곤에게 정말 고마운 여자이다. 그뿐만 아니라 에곤에게 예술적인 영감을 주는 뮤즈이기도 했다. 한동안 인생의 동반자이면서 애인이면서 모델역할도 해줬다.


<에디트의 초상화>(1915)

에디트 함스(Edith Harms, 1893~1918)

  스튜디오 근처의 에디트와 아델레 자매에게 동시에 관심을 가진다. 그녀들은 부족함 없이 사는 중산층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스튜디오 창가에서 괴상한 포즈를 취하고 소리를 질러 그녀의 주의를 끌고 그 다음날 쪽지를 보내고 데이트를 제안했다고 한다. 유혹임을 티 안 내려고 자기의 애인 발리도 같이 놀러 갔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으로 에곤 쉴레는 징집이 된다. 에곤 쉴레는 복무 중에도 자신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줄 여자가 필요했다. 그는 군대에 가면 자신의 예술인생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출퇴근해서라도 그림을 그리고 자신을 지원해 줄 여자를 원했다. 그렇지만 발리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에곤 쉴레는 돈도 좀 있고, 사회적으로 눈치를 받지 않는 집안의 여자인 에디트를 결국 선택하고 결혼을 결심한다. 

  그런데 발리와의 관계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했다. 발리에게 자신이 결혼하더라도 1년에 한 번은 자기와 여행을 가주겠다고 이상한 약속을 제안한다. 그리고 발리는 에곤 쉴레를 떠난다. 에디트와 아델레 두 자매에게 작업을 걸 때 발리가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발리를 연인보단 예술을 위한 도구로 생각한 것 아닐까. 

<죽음과 여인>(1915) : 에곤과 발리의 이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에곤 쉴레는 에디트와 결혼에 성공하고, 3일 후에 징집되었다. 그래도 프라하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호텔에 있는 부인 에디트를 만나기 힘들었는데, 통역병이 되고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상관이 배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에곤은 복무 중에도 스튜디오를 마련하여 다양한 세계전에 출전했다. 

<포옹>(1917)

에디트와 결혼 후 그렸다. 같은 남녀의 포옹이지만 <죽음과 여인>과는 아주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있는 여인>(1917)

  그의 부인인 에디트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자매인 아델레를 그린 그림이다. 가장 인기 있는 그림 중에 하나이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다.


  1918년 클림트가 사망하고 한 달 후에 열린 49회 분리파 전시회에서 에곤쉴레가 메인이 되었는데 이 전시회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작품이 다 팔리고, 초상화 의뢰가 넘칠 정도로 유명해졌다. 돈도 제법 많이 벌게 되어 에디트와 함께 정원과 작업실이 있는 대 저택으로 이사했다. 

<가족>(1918)

1918 가족 : 에디트와의 사랑과 행복한 가정의 꿈을 느낄 수 있다. 그림 속의 아이는 상상의 아이이다. 이 당시 에디트는 임신 중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의 화목한 가정을 기대하며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보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스페인 독감으로 2천만 명에서 5천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그 스페인 독감으로 부인 에디트가 임신 6개월째에 사망했고, 에곤쉴레도 3일 뒤에 사망했다. 28세에 마감한 천재화가였다.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

네이버 블로그(영문)


이 글을 쓰는데 허세미술관 이안님의 영상의 도움이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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