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성공한 예술가
클림트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고 그림에 대한 글 인터뷰도 거의 않했던 화가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했고, 보헤미안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매우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가 금 쇠공 장인이었다. 유럽은 시민혁명 이후에 자유주의, 민족주의 정신이 확산되던 시기에 새로운 계급이 나타나던 시기인데, 오스트리아 빈은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었다. 오스트리아 미술계는 이 시대적 배경과 비슷하게 미술도 역시 보수적인 신고전스타일을 계승하며 다른 유럽의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반아카데미즘으로 구스타브 쿠르베같은 사실주의, 모네, 마네와 같은 인상주의가 활발하던 시기인데 그런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장 고립되고 갇혀져 있던 오스트리아 빈 이었다. 그런 시기에 그림을 배운 클림트는 아카데미즘이 무엇인지 에션셜하게 느낄 수 있는 소묘를 보여준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 돈을 벌기위해 황실공예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건축물을 르네상스부터 신고전주의 바로크양식의 건축물을 짓다보니 그림역시 프레스코화로 꾸몄다. 그래서 벽화를 그릴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주로 공예학교의 교수들이 주도적으로 했다. 교수들이 이것을 마치지 못하면 학생들에게 마무리 시켰다. 학생이던 클림트가 벽화를 그려보고 돈이 되는 것을 알자, 그의 친구와 친구의 동생과 예술 컴패니를 조직했다.
이 당시 그린 그림들중 하나이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브로크 극장 천장화인데, 연극을 보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를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구도, 짜임새 그리고 표현력을 보면 진짜 타고난 천재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의도하면 카메라나 사진 이상으로 잘 그릴 것이다. 신고전주의 화가 중에서 역대급 재능있는 화가이다. 그는 30대 초반에 빈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업가이자 예술가였다.
비록 오스트리아 빈에만 있었어도, 그는 밖의 세상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회의감을 느껴 오스트리아 예술가 연합을 탈퇴한다. 클림트처럼 보수적인 아카데미즘 예술에 불만을 가진 예술가들(화가뿐만 아니라 조각가, 공예가 등등)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중 리더가 클림트였다. 빈 분리파 전시관을 따로 만들어서,기존의 예술 연합과 완전히 분리했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으로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게 된다.
반사실주의라고도 하며, 구스타브 클림트 같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화된 미술이 아니며, 사실주의와 정반대의 미술 개념이고, “시각적으로는 구체적이지만 비밀을 숨긴 비현실적며 신비로운 그림”이라는 의견도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표현주의와 비슷 한 것이 굉장히 많다. 상징주의는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있고, 표현주의는 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녹은 그림이라고 구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상징주의는 아래 그림처럼 미스테리한 그림이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864) - 귀스타프 모로
<키클롭스의 눈(1989) >- 오딜롱 르롱
프랑스어로 새로운 미술을 뜻한다. 아방가르드와 성향이 비슷하다. 그전의 미술이 답을 고전에서 찾았다면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대표적인 화가로 “알퐁스 무화”:가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장식적인 자연 모티브를 많이 사용했다.
아르누보는 산업혁명 이후에 기기가 만드는 싸구려 예술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경향도 있고, 해법 대안으로 사람의 손에 의한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그래서 장식이 많다. 그러나 대량 생산을 하면 단기간에 많이 판매가 가능한데, 아르누보는 사람 손으로 모든 작업을 하다 보니 기능 위주의 모더니즘에 밀렸다. 모더니즘은 애플의 아이폰같은 심플하고 장식없고 깔끔한 디자인이다. 과거 공예에서 현대 디자인으로 가는 과도기에 있어서, 아르누보는 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클림트는 황금의 화가로도 알려져 있다. 주로 황금으로 그렸던 시기를 황금시대라고도 하는데, 황금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클림트의 아버지의 직업이 금 쇄공 장인이었기 때문에 어렸을때부터 금박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고 추측된다. 그리고 클림트가 정기적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많이 갔었는데, 그 당시의 이탈리아 중세의 비잔티움 미술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가장 클림트다운 그림 중에 하나로 유대인 부자의 어린 아내를 그린 아델레의 초상이 있다. 세계대전 이후 법적으로 아델레 후손에게 반환되면서 엄청난 가격에 경매에서 팔렸다. 그 후 노이어 미술관에 이 그림이 있는데, 노이어 미술관은 잘 열지 않아서 보기 힘든 그림이다.
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클림트의 그림 중에 키스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비주얼적인 효과와 구성, 디자인으로써의 감각을 보았을때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클림트의 전성기 시절 그림이다.
클림트의 작업실은 항상 누드모델들이 있었다고 한다. 법적으로 클림트는 최소 3명의 자녀가 있다고 하는데, 클림트가 죽고 14명의 여인이 친자확인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빈의 카사노바라고 불릴 정도로 바람둥이 였다. 방탕한 생활을 했을 것 같은 그이지만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종일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결혼은 안했지만, 빈에서 성공한 사업가이며 패션 디자이너인 12살 연하 에밀리 플뢰게(1874~1952)와 플라토닉한 관계로 진지하게 연인이었다. 클림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결혼을 하게되면 그녀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할까봐 일부러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글쓰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클림트이지만, 에밀리에게는 편지를 400개 이상 보냈다. 또한 1918년에 죽기 직전에 마지막 외친 말이 “에밀리”라고 한다. 많은 여인들과 방탕한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에밀리 뿐이었다. 에밀리와의 자식은 없어서 정말 플라토닉한 사랑을 한것으로 알려져있다. 클림트는 사랑하는 방식도 정말 특이한 것 같다.
어떤 화가든지 대성공을 거두려면 기득권 세력과 싸워야 해야하나보다. 그래서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고 엄청난 논란을 가져와야 그 뒤에 역사적으로 성공하는 것 같다. 역시 클림트도 엄청나게 욕을 먹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예술가 컴퍼니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빈 대학이 클림트에게 의학, 법학, 철학이라는 테마로 벽화를 의뢰했다. 빈 대학은 이전에 클림트가 성공했던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그려줄 것을 기대했지만, 클림트는 빈 분리파를 만든 후라 자신의 소신대로 그림을 그린다.
빈 대학이 이 그림들을 보고 무슨 느낌이었을까? 교육부에서는 승인을 해줬지만, 빈 대학장은 저질스럽고 외설스럽다며 이런 그림을 어떻게 대학교에 놓냐고 엄청난 비난을 했다. 결국 세 그림들은 개인들에게 팔리고, 2차 세계대전 중에 화재로 사라진다. 이 그림들을 그릴 당시, 빈에는 현대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로이트가 활동했다. 그와 클림트가 친분이 있는지는 모르나, 둘이 만약에 교류를 했다면 클림트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의문이 드는 그림이다. 마치 무의식인 꿈속 같은 이 그림들에서 클림트 이후에나 나오는 초현실주의 화풍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살라도르 달리가 봤다면 정말 좋아했을 것이다.
클림트는 1907~1908년 쯤에 황금 시리즈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데, 이 후의 작품들은 전보다 주목 받지 못했다. 그의 후배 에곤 쉴레에게 밀린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클림트가 있었기에 에곤 쉴레가 있었던 거고, 시대의 거장이 에곤 쉴레로 바뀐 것이지, 클림트의 재능이 에곤쉴레에게 밀린 것은 절대 아니다. 각자만의 개성과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신고전주의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만, 보수적인 다른 신고전주의 화가들과는 다르게 그 틀을 깨버리고, 새로운 시도들을 계속 한다. 당시 보수적인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후배 예술가들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신고전주의 벗어나려 하면 아주 싫어했다. (그들의 헤게모니를 잃을까봐?) 신고전주의 하나로도 성공하기 힘든데 상징주의로도 성공을 한 위대한 화가가 또 있을까? 다른 화가들이라면 황금시리즈가 성공을 하면, 계속 황금시리즈와 비슷한 작품들을 만들텐데, 클림트는 그러지 않았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다른 영역에 도전했다.
후기 인상주의스타일의 풍경화도 엄청나다.
클림트를 제외하고 누가 고전주의 화가와 현대미술 화가로 동시에 큰 성공을 이뤘는가?
이 글을 쓰는데 특히나 허세미술관 이안님의 영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