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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Nov 09. 2023

세잔의 사과

인류의 세 번째 사과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 - <사과바구니가 있는 정물>(1895)

  세상을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 첫 번째는 이브의 사과이고,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이며, 세 번째는 세잔의 사과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를 네 번째 사과라고 말한다. 사과라는 과일이 맛있어서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닐 거다. 사과는 어느 존재자에게 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 혁신의 수단이자 매개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따라서 이브는 사과를 따먹음으로써 금기를 깨고,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세잔이 사과를 이용해서 어떻게 미술계에 혁신을 가져왔는지 알아보려 한다. 왜 세잔이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릴까? 


  사실 세잔은 그가 예술활동을 할 당시에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후계자인 피카소는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불렸는데, 그는 조롱과 비난을 많이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미술의 대세가 정물화였기 때문이다. 분명히 세잔의 그림도 정물화이다. 심지어 작품 이름에 '정물'이란 단어가 들어간다. 그런데 왜 세잔의 정물화는 비난과 조롱을 받았을까? 그 이유는 세잔의 구도에 있었다. 정물화의 목적은 실제 사물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즉,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 대상을 카피해서 캔버스에 옮기는 게 당시의 '올바른 예술'이었다. 하지만 세잔의 구도는 그것과 전혀 다른 시점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그가 당시엔 드로잉의 기초도 안된 무지렁이 취급을 받았지만, 후대는 그를 하나의 시점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게 그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하나의 시점에서 벗어나 여러 시점의 현상들을 하나의 그림에 종합해 놓은 것. 그리고 그 혁신을 대표적으로 보인 그림들은 주로 사과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었다.


  세잔은 사과 말고도 많은 대상들을 그렸다. 빅투아르 산, 그의 아내와 같은 풍경화, 인물화 등. 하지만 그는 사과를 통해서 혁신을 가져왔다. 따라서 우리는 왜 세잔이 그토록 많은 대상 중에서 사과를 골랐는지 먼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왜 그 사과가 미술계에 혁신을 가져왔는지 다음 절에서 알아보려 한다. 그리고 세잔의 후계자라 불리는 두 예술가에게 세잔이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 알아보고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세잔이 사과를 고른 이유

  세잔의 많은 정물화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오브제는 사과이다. 하나의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던 세잔은 하나의 대상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관찰했다. 세잔은 그의 아내를 그린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화도 종종 그렸다. 하지만 인물화는 그려지는 대상이 그림 한 점을 위해서 수 백번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몇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세잔은 모델이 조금이라도 포즈에서 벗어나면 엄청나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러한 세잔의 성격을 보면 오랜 시간 동안 편하게 가만히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델이 그에게 알맞는 피사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있는 사물 그 자체를 카피하는 정물화를 선호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인물이나 풍경은 시시각각 날씨의 영향을 받는 풍경화와는 다르게 고정된 사물은 시간과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또한 정물화는 화가 마음으로 사물의 위치나 포즈를 바꿀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릇, 물병 등 다양한 사물을 피사체로 골랐다. 그중에서 사물의 입체감을 가장 잘 탐구할 수 있는 것이 과일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그중에서 사과, 오렌지와 같은 과일을 선호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잘 썩는 복숭아, 살구보다 겉이 단단하고 잘 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어서 세잔의 정물화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는 평생 100여 점이 넘는 수많은 사과를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과를 통해서도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는 하나의 사과가 가진 모든 형태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과가 가진 모든 빛깔을 담아내고자 했다.


미술계의 칸트?

  칸트 이전의 철학계는 합리주의(관념론)와 경험주의로 양분되었다. 전자는 흔히 대륙철학이라고도 불리고, 후자는 영미철학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칸트의 철학은 이 두 개를 하나로 합친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새로운 이론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다시 나뉜다. 헤겔처럼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철학과 쇼펜하우어처럼 물자체의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으로. 그래서 칸트는 서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존재이며, 서양철학의 저수지라고도 불리는 대가이다.


  세잔도 칸트와 비슷한 영향을 미술계에 미쳤다. 우선 세잔 이전에 인상주의와 고전주의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고전주의 미술은 사물 자체를 그리고자 했다. 칸트식으로 말해서 그들은 물자체를 그렸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시간, 공간, 빛, 날씨 등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절대적인 피사체를 그리고자 했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그 반대였다. "과거의 화가들은 사물을 ‘있는 대로’ 그렸다. 반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 그렸다. 과거의 화가들이 ‘객관’을 지향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관’을 지향했다. 과거의 화가들이 ‘대상’을 그렸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대인의 ‘시각’을 그리려 했다. 모네는 수련을 그린 게 아니라, 도시인의 눈에 비친 인상을 그렸다. 모네가 그린 것은 수련이 아니다. 모네는 결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모던의 지각을 그렸다(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3』, 39).” 

고전주의 미술인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인상주의 미술인 모네의 <루앙 성당>

  이처럼 인상주의와 고전주의는 추구하는 바가 상이했다. 세잔은 당시 주류였던 인상주의에서 다시 과거의 고전주의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고전주의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인상주의의 성과를 버리지 않으려고 했다(진중권, 미학 2, 28). 칸트가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합쳐 새로운 철학을 탄생시킨 것처럼 세잔도 고전주의와 인상주의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키려 했다.


  그 결과 아래의 그림과 같은 작품을 탄생시킨다.

<사과와 오렌지> (1899)

  사물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받는 빛의 영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색으로 보일 수 있다. 또한 보는 시점에 따라서 다른 형태로 보인다. 대중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그림은 하나의 시점에서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재현한 단일한 시점에서 표현된 그림일 것이다. 따라서 화폭에 담긴 모든 피사체는 눈에 보이는 현상처럼 같은 빛의 영향을 받고, 같은 각도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세잔은 하나의 그림을 그릴 때 하나의 시점이 아닌 여러 시점으로 피사체를 관찰하고, 표현함으로써 기존과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시점의 다각화로 원근법은 의미가 없어졌고, 대상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르게 표현되었고, 색상 또한 기존의 그림들과 다르게 표현되었다. 따라서 세잔은 기존의 색채와 구도를 벗어난 최초의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마티스의 야수주의적 작품 <모자를 쓴 여인>과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작품 <바이올린과 포도>

세잔의 두 후계자

  칸트 이후로 물자체에 대한 인식으로 철학이 다시 나뉜 것처럼, 세잔 이후에 미술은 두 갈래의 사조가 탄생한다. 세잔이 미술에 가져온 혁명은 두 가지였다. 기존의 단일한 시점이 아닌 다양한 시점을 표현했기 때문에 하나의 평면에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색상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세잔은 형태와 색상으로 미술계에 혁신을 일으켰다. 


  피카소는 세잔에게서 평면을 기하학적 단면들로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면, 마티스는 세잔에게서 또 다른 측면, 즉 풍부한 색채와 빛나는 표면을 발견했다(미학 2, 33). 즉, 피카소는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고, 마티스는 대상으로부터 색채를 해방시켰다. 피카소는 세잔으로부터 받은 형태에 대한 영감을 입체주의(Cubism)로, 그리고 마티스는 세잔으로부터 받은 색채에 대한 영감을 야수주의(Fauvisme)로 발전시킨다. 


  모자이크 단편을 쌓아 올려 대상을 구성하는 세잔의 방법은 입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입체주의자들은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해체해서 다시 종합하려 했다. 그들을 입체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세잔의 방법을. 2차원 평면과 3차원 공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입체주의자들은 사물을 여러 시점에서 본 시각적 단편들을 모아 그것들을 하나의 평면에 재조립하려고 했다(미학 2, 30).


Reference

예술의 이유 - 「사과드립니다」, youtube.

진중권 - 『미학 오디세이 2』, 『미학 오디세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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