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cault's aesthetics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으로, 하이데거는 고흐의 작품으로 예술을 논했지만, 푸코는 자신만의 정의로 예술을 논하지 않았다. 푸코는 조형예술보다 문학작품에서 주로 영감의 원천을 얻었기 때문에, 그가 예술을 언급하거나 작품을 인용한 부분은 우리는 예술적 비평보다는 주제의식을 가시화하기 위해서 서두를 장식하는 일종의 미적 엠블렘에 불과하다. 철학자들이 예술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예술이란 어떤 것이다. 어떤 작품이 진리를 드러내며, 우수하다"라는 말을 하는데, 푸코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실존 자체를 예술작품처럼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더 이상 개인들 혹은 인생과 관계를 맺지 않고 오로지 사물과만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닐까?(드레이퓌스 · 라비노, 『미셸 푸코 : 철학 산책』)"
푸코의 연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지식의 고고학'으로 명시되는 그의 초기 철학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지식을 가진 주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권력의 계보학' 시기의 질문은 "권력관계에서 행사되기도 하고 그 앞에 복종하기도 하는 주체들인 우리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리고 '윤리의 계보학' 시기의 질문은 "어떻게 우리가 행위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되는가?"이다(강미라, 『몸, 주체, 권력』). 따라서 푸코의 평생 연구 주제가 인간의 주체화와 그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푸코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길 자신의 관심사는 항상 주체였다고 한다. 그래서 푸코의 연구주제가 권력에서 갑자기 실존으로 변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전회 혹은 학문적 단절은 그의 철학적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학문적 양태의 변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주체에 대한 연구를 본질로 삼았으며, 초기에는 지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의 철학을 드러냈으며, 중기는 권력을, 후기에는 윤리학과 존재미학을 통해서 자신의 주체철학을 이야기했다. 따라서 푸코가 권력론에서 도피해서 윤리학을 택했다는 일부 주장은 터무니없는 낭설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 시리즈를 원래 6권으로 기획했었다. 『성의 역사』는 여자와 남자, 허락되는 성과 금지되는 성, 정상적인 성과 비정상적인 성 등, 성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항대립적인 사실들을 권력과 지식의 문제와 관련시켜 성담론을 둘러싼 진실의 문제를 탐구한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다(오생근, 『미셸 푸코와 현대성』, 321). 하지만 1976년에 1권 『지식의 의지』를 출판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84년까지 2권을 출판하지 않았다. 1권까지를 흔히 권력의 계보학 시기라 보고, 그 뒤로 푸코는 윤리의 계보학(혹은 주체의 윤리학)의 시기에 들어섰다고 학자들은 본다. 그렇다면 왜 1권 『지식의 의지』와 2권『쾌락의 활용』 사이에 단절이 발생했을까?
들뢰즈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를 단절의 원인으로 본다. 첫째로, 이전 저서들(권력의 계보학 시기)은 17세기와 19세기 사이의 짧은 기간을 고찰했지만, 2권에서는 그리스인들과 더불어 시작하여 기독교를 거쳐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친 시대를 대상화했다. 두 번째, 이 책은 이전의 저서들의 대상이었던 권력의 관계와 지식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으로서 자기와의 관계를 발견하고 있다. 세 번째, 권력과 지식의 이중적 관점에서 성을 연구했던 『성의 역사: 앎의 의지』와 그 이후의 『성의 역사: 쾌락의 활용』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의 책에서 자기와의 관계는 잘 밝혀져 있지만, 그것과 성문제의 관계는 불확실하다(오생근, 『미셸 푸코와 현대성』).
1권이 1976년에 나오고, 푸코가 자신의 죽음을 예상했는지 2,3권은 그가 작고하기 직전에 나왔다. 성의 역사 시리즈가 원래 6권으로 기획되었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윤리의 계보학 시기로 넘어온 푸코가 기존과 같이 6권으로 시리즈를 구성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3권이 끝이 아니었다. 4권의 유고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푸코의 유언대로 그의 유고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학자들의 설득과 철학계의 발전을 위해서 유가족은 그 유고를 2018년에 공개했다. 그래서 성의 역사 시리즈는 어떻게 보면 4권으로 완결되었다. 1권에서는 푸코의 냉철함을 느낄 수 있으며, 17세기부터 그가 살던 시대까지를 연구했기 때문에 그 이전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2권부터는 고대까지 그의 연구범위가 넓어지며, 그 특유의 비판적인 사유의 색채가 덜해짐을 느낄 수 있다.
푸코의 미학은 작품인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 자체를 작품으로 본다. 그런 면에서 푸코는 스스로를 예술작품 만들듯이 배려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니체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생각나게 한다.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 푸코는 니체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는데, 그는 『도덕의 계보학』의 니체철학을 수용했음을 인정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선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어찌 보면 구조주의자로 취급되는 학자가 그 반대편 학파인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아이러니할 것이다.) 후기에 존재의 미학의 색채가 강해진 푸코에게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푸코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삶을 말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자기 배려-자기의 테크놀로지라고도 불리는-에 특히 주목했다. “그리스어의 ‘테크네’는 무엇보다도 미적, 윤리적 실천의 수완을 가리킨다. 따라서 푸코가 말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란, 주체가 담론의 효과 혹은 지식-권력의 함수로 머무는 데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미적, 윤리적 주체로 세우고, 자기의 배려를 통해 제 삶을 예술적 완성으로 끌어올리는 존재미학의 수완이라 할 수 있다(진중권, 현대미학, 174).”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소년애 개념을 가져온다.
그리스인들에게 부부는 연인이라기보다 가정 관리를 위한 조력자의 의미가 강했으며, ‘에로틱’은 부부 사이의 사랑이 아니라 성인 남성과 어린 소년 사이의 동성애 관계를 배려하는 수완이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이성애, 게이, 레즈비언이 공존했으며, 특정한 성애를 보편적 규범이라 규정하지 않았다. 규제해야 할 것은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이 있었다. 양적인 것은 그것이 과도하냐, 적절하냐에 대한 것이고, 질적인 것은 성관계 속에서 역할이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 하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를 통해서 후손을 얻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육체의 유한성을 극복한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성인 남성은 소년을 통해서 정신의 영원성을 얻는다고 믿었다. 미소년에게 자기 생각의 씨를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사유-혹은 영혼-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 믿었나 보다.
성인 남성과 미소년 사이의 성애는 그저 성적인 쾌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폴리스의 미래를 담당할 2세들을 교육하는 공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진중권, 176~177). 즉, 당시의 남성은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유한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여성과의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후손을 탄생시킴으로써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소년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줌으로써 자신의 사유가 자신의 육체가 한계를 맞이하더라도 세상에 남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성인 남성과 미소년 사이의 관계에서 성인 남성은 소년의 육체를 받고, 자신의 지식을 전해준다. 반대로 소년은 자신의 육체를 그에게 줌으로써, 그의 지식을 전승받는다. 즉, 이 관계는 그저 어른의 쾌락만을 위한 착취가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윈윈관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소년을 ‘남자(능동적인 역할)’로 만드는 것이 ‘성인 남성’의 역할인데, 이는 모순이다. 소년은 성관계에서 여성의 역할(수동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소년이 자라남에 따라서 점차 그 관계의 성격을 ‘사랑(aphrodisia)’에서 ‘우애(philia)’로 전환시켜야 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할 남성이 성인이 되도록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그들의 도덕에 위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 남성과 소년의 동성애는 적절한 시기에 서서히 남성적, 여성적 ‘불평등한’ 아프로디지아의 관계에서 능동적인 두 남성 사이의 ‘평등한’ 필리아의 관계로 발전해야 했다(진중권, 177~8).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당시의 기준으로 올바르게 발현된다면, 육체적 사랑에 머물지 않고 대등한 주체가 되어 함께 저 지혜의 세계, 저 천상의 이데아를 향해 올라가는 연인의 등에는 깃털이 돋아나, 두 사람의 영혼은 날개를 달고 저 천상으로 상승하게 된다(진중권, 179). 그들의 소년애는 그저 착취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는 육체적인 아프로디지아(Aprodisia)를 필리아(Philia)로 전환시키는 존재의 미학이자, 폴리스 남성들의 향연이었다. 소년은 성인 남성이 되어가면서 능동적인 존재가 되며, 수동적인 소년의 탈을 벗는다. 그리고 성인 남성은 소년이 성인이 되는 것을 바라보며 늙는다. 성인 남성은 늙으며 그저 소년이 크는 것을 보는 걸로 그의 존재미학을 완성하지 않는다. 그는 아프로디지아를 필리아로 승화시키면서 절제를 체화한다. 수동적인 소년을 능동적인 성인으로 만들면서 그는 육욕에 지배당하지 않고, 소년을 육체적 대상이 아닌 정신적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결국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 혹은 존재미학이란 자기 자신의 절제와 같은 자기 통제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도파민 중독인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푸코의 주장은 다시 한번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푸코가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푸코는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안을 찾고자 한 것이지, 고대로 복귀하자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고대는 그저 하나의 레퍼런스였다.
푸코의 말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예술작품처럼 다스려야 할 것이다. 화가가 공들여서 자신의 그림에 붓칠을 하고,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을 다듬으며 작품을 탄생시키듯이, 우리도 우리 인생을 그런 태도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지는 제작자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