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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Nov 16. 2023

관례, 규범, 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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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1913~1974) - <우주>(1971)

  예술은 정보 소통의 과정이며, 작품을 감상하는 건 일종의 해독이다. 이럭저럭 여기에 성공할 경우 예술가의 머리에서 떠난 정보는 마침내 목표인 수신자의 머리에 도달하고, 이로써 예술적 소통은 완수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수신자가 예술언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예술은 하나의 언어일 수도 있다. 아니 언어를 초월한 추상적인 매개수단일지도 모른다. 과거에 의미 정보와 미적 정보가 서로 조화를 이루던 고전주의적인 예술은 추상적이지 않고 직관적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은 의미 정보가 미적 정보에 비해 매우 희미해서 우리는 예술을 통한 정보 소통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작품의 해독 또한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의미를 중시한 고전주의 예술에선 대상의 형태가 가장 중요했다. 색채는 단지 대상의 형태를 분명히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대 예술에선 대상성이 사정없이 파괴된다. 형태와 색채는 대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구성을 이룬다. 결국 고전주의 예술은 의미 정보를 추구한 반면, 현대 예술은 의미 정보를 단순화하는 가운데 미적 정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AO2, 239-241).” 


  미술은 언어였다. 과거 그리스도교는 글을 모르는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서 성경을 그들에게 설파했다. 유대교와 이슬람의 경우는 우상숭배를 금기시하기 때문에, 야훼나 알라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예술이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비교적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형상을 추구함으로써 의미 정보를 중시 여겼지만, 다른 종교는 우상숭배를 금기시했기 때문에 기하학적 패턴을 통해서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어서 미적 정보를 중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예술은 과거에는 자명한 언어였다. 예술은 과거에 미술, 음악, 무용과 같은 현대에도 예술로 취급받는 장르 외에도 건축, 항해, 치료와 같은 기술도 포함했었다. 오늘날 예술이란 굉장히 대자적인 활동만으로 한정하지만, 과거의 예술이란 즉자적인 활동 또한 포함하는 기술(Techne)였다. 기술이라 함은 정석이 있는 수단이자 능력이다. 어쩌면 근의 공식이나 베르누이 방정식처럼 정해진 틀이 있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 업무의 기술 등은 특정한 목표를 도달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래서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은 기술이 아니다. 따라서 꼭 어느 목표에 도달할 필요가 없어졌다. 앞에서 예술은 언어였다고 언급했는데, 예술이 언어였던 이유는 예술가라는 발신자의 정보가 작품을 매개로 관람자라는 수신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을 잘 이해한다는 것은 발신자의 정보와 얼마나 비슷하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였다. 과거의 예술은 의미정보를 기초로 한 소통방식이었다.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계기로 그림이 품고 있는 암호를 해독했으며, 예술가가 담은 정보를 파악하고자 했다. 


  의미 정보가 미적 정보에 역전당하면서 예술은 더 이상 정보 소통의 수단이 아니게 되었고, 작품은 예술가의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그저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과거의 관람자들은 작품이 품은 암호를 해독할 의지가 있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 여겼다. 하지만 의미 정보를 찾을 수 없는 광활한 캔버스에 압도당해서일까, 현대의 대중은 그 암호를 해독할 의지를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그저 예술이 사기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하는 대중도 늘었다. 그래서 갈수록 추상화(化)되는 현대 예술은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갔으며, 매니악한 분야가 되었다. 


  현대 예술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왜? 소통은 ‘코드’를 전제하고, ‘코드’는 획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 안에 통용되는 ‘코드’를 거부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예술은 평균적인 대중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는 현대 예술이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에 항의하는 방식이다. 고전 예술은 대중과 ‘코드’를 공유했다. 현대 예술은 일부러 그 공통의 ‘코드’를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오직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낸다. 현대 예술이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왜 현대 예술은 사회에 널리 공유되는 코드를 거부하고 굳이 이해되지 않으려 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 예술은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다(AO3, 145).

 

  "예술가는 진리의 여신이 걸치고 있는 베일을 한 장 한 장 벗기면서 아무리 벗겨도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여신의 모습을 황홀한 눈으로 보지만, 이론적 인간은 내동댕이친 베일에서 즐거움을 느껴 만족하며, 그의 최고 목표는 자기의 힘으로 베일을 벗기는 과정 자체에 있다(GT)." 니체는 예술은 파악될 수 없는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것일까? 예술을 낚시에 비유하자면, 예술가는 물고기를 잡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 잡는 과정을 즐기는 것일 거다. 절대로 잡을 수 없는 대어이지만, 그것을 낚으려고 하는 그 노력에서 쾌감을 얻는 것이다. 예술은 정의될 수도 없으며, 파악될 수도 없을 것이다. 예술이 만약 어떤 방식으로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지 밝혀지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닐 것이다. 그건 정념의 기술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정념의 기술이 밝혀지도, 결국 그 기술의 한계가 올 것이다. 그럼 또 우린 예술을 잡아서 정념의 기술로 만들 것이고, 다시 또 예술을 포착하려 할 것이다.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또는 쾌와 불쾌와 같은 미지의 감정들을 주는 것이 예술일 텐데, 공산화되고, 기성화 된 예술은 과연 그럴까. 사실 이러한 예술의 붕괴는 진작에 도래했다. 변기가 예술이 되고, 바나나가 예술이 되었으며, 동물의 사체까지도 예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체 신비롭고, 감동적이지 않은 그것을 무엇이 그것들을 예술로 만드는가?


<샘>이 다른 변기들과 달리 예술 작품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예술계가 <샘>에만 특별히 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실 세상에 있는 어떤 물건도 예술계가 거기에 자격을 부여하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예술계가 자격을 부여하자 변기까지도 예술이 되었다. 예술과 사물 사이에 만리장성은 없다. 그럼 하나의 사물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예술계의 인정이다. 만약 어떤 사물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게 그 사물의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예술계라는 제도라면, 결국 예술의 본질은 '코드'에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느 대상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코드다. 예술의 본질은 이제 코드로 거처를 옮겼다(AO2, 194-7).


Referene

진중권 - 미학 오디세이 2 [AO2], 미학 오디세이 3 [AO3]

F.W. 니체 - 『비극의 탄생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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