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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Nov 24. 2023

감옥에 대하여

About prison

장피에르 루이 로랑 위엘 - <바스티유 습격(La prise de la Bastille)>(1789)

  정보의 전달이 간편한 만큼 우리는 부정적인 뉴스도 긍정적인 뉴스만큼 접한다. 혹은 전자가 더 넘쳐날 수도 있다. 특히나 엽기적인 범죄일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으며, 더 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종이신문으로 기사를 접할 땐,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알 수 없지만, 인터넷으로 기사를 접하면 우리는 댓글을 통해서 타인들의 의견도 볼 수 있고, 대댓글을 닮으로써 그 사람과의 의견 교환 및 적극적인 동조가 가능하다. 


  사람들이 자극적인 뉴스에 더 관심을 많이 가져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그런 뉴스에 익숙해서 그런 것만 보이는 것인가?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기사와 뉴스들의 제목을 보면 범죄에 대한 내용이 많은 것 같다. 살인, 가스라이팅, 사기, 폭력 등 그런 내용들. 세상이 각박해져서 사람들이 범죄를 더 저지르는 것일 수도 있고,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연유로 인간의 악한 본성이 더 잘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요즘에 범죄란 굉장히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며, 대중들에게도 점점 그 심각성이 익숙해지고, 무뎌져 가는 것 같다. 


  그리고 범죄 소식뿐만 아니라 형벌에 대해서도 우리는 접할 수 있다. 누가 어떤 일을 벌였는데, 그래서 결과적으로 얼마의 벌금과 얼마동안의 징역이 선고되었다던가 그런 거 말이다. 그런 기사들의 댓글을 보면 그 형벌에 대해서 옹호하기보다는 형벌이 너무 가볍다는 댓글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왜 저 범죄자들을 내가 낸 세금으로 먹이고, 재우고, 갱생시키냐고 불만을 갖는다. 그러게, 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사회에 해를 끼친 범죄자들을 먹여 살려야 할까? 심지어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보다 수형인의 대우가 더 좋다는 말도 돌더라. 대체 왜 감옥은 존재하며, 그 기능은 무엇일까? 그리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더 공리적인 방안은 없을까? 이게 오늘의 질문이다.


  감옥이라는 곳은 익숙하지 않으며,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 밖이며, 그곳에 대해 몰라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 그런데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84)는 『감시와 처벌』(1975)을 통해서 우리 사회 전체가 권력관계의 장(Field)인 감옥과 같은 곳이 아닌가 의심을 던졌다.


감옥의 목적

  푸코는 권력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를 1968년 이후라고 말한다. 그 전의 푸코는 권력보다 지식을 가진 주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준 68 혁명 이후로 푸코는 이 혁명 이후로 "권력의 계보학" 시기의 푸코로 탈바꿈한다. 시기 푸코는 감옥정보그룹(GIP)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수형자들의 인권에 대한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는 감옥이라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수형자들이 어떻게 대우를 받고,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 이 단체를 통해서 조사했다. 감옥이라는 곳이 아무나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범죄를 저질러야 가는 곳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가혹행위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푸코는 그 감옥이라는 가깝지만 먼 이질적인 공간에 관심을 가졌다. 


  감옥이라는 곳은 흔히들 범죄를 저지르면 가는 곳으로 마음대로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인식한다. 맞다. 감옥을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 수용돼도 나오고 싶다고 나올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사법체계는 그들을 감옥이라는 곳에 가둠으로써 그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일까? 사회에 큰 피해를 주고,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왜 살려놓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심지어 아프면 치료해 줄까? 사형, 화형, 도모지 잔인했던 과거의 형벌이 어쩌다 훨씬 부드러운 '감금'이라는 형벌로 대체되었는지를 알아보면서 이유를 알아봐야겠다.(이런 방법을 철학에서는 '계보학'이라 하더라) 


  과거의 신체형은 화려한 것이어야 하고, 사법 측의 완전한 승리로 만인에게 각인되어야 했다. 따라서, “죄인이 고통을 받아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사법의 수치스러운 측면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는 사법 행사 그 자체이다. 아마 피처형자의 사후에도 신체형이 전개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을 것이다(DP, 80).” 과거의 신체형은 시민들에게 권력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가혹한 형벌이 필요한 이유는 그러한 본보기 처형이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범죄자의 처형당하는 신체를 통해 군주의 격앙된 현존의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그 목표이다(DP, 106).”


  하지만 “17세기말 이후에는 유혈 범죄와, 일반적으로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이 대폭적으로 감소되는 현상이 두드러졌고, 흉악한 범죄 대신에 소유권의 침해가 많아서 절도와 사기가 살인이나 상해, 구타와 자리바꿈을 한 것처럼 보였다(149).” 즉, 살인과 같은 흉악한 범죄가 감소하고, 절도와 같은 소유권에 대한 범죄가 증가했다. 따라서, 법제의 형벌 완화보다 선행하여 범죄의 내용이 완화된 것이다. 이러한 범죄의 변화에 의한 이유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 무섭게 처형당하는 죄인을 본보기 삼아 그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고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갖도록 공개처형한 것이 오히려 권력의 의도와는 달리 죄인에 대한 민중의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계기를 초래했기 때문이다(FM, 121).” 권력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 시민들이 공포에 떨어 그 힘 앞에 유순해질 줄 알았으나, 오히려 과시한 힘에 의해서 유순하게 다스려야 할 대상들이 똘똘 뭉쳐서 그 권력에 대항하게 되었다. 그래서 권력은 직접적이고, 과시적이지 않은 양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로 마음을 바꾼다. 그래서 육체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적이고, 직접적인 형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적인 형벌로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18세기말에 화형과 교수형 같은 무서운 신체형이 사라지고 감옥에 죄수를 가두는 부드러운 감금형이 등장한 것은 권력의 인간적인 변화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경제학적 필요성 때문이다(FM, 121). 여기까지 왜 감옥이 주요한 형벌로써 자리 잡게 되었는지 알아보았고, 이제 진짜로 감옥의 목적에 대해 알아보자.


  신체 처벌의 관념이 나약한 인간의 마음에 항상 깃들어 있도록 하여 범죄를 지향하게 되는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 또한 형벌은 범죄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법은 사필귀정인 것처럼 보여야 하며, 권력은 부드러운 자연의 힘처럼 자신이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채 작용해야 한다(DP, 202~3). 뿐만 아니라 범죄의 유혹을 느끼게 만드는 욕망을 감소시켜 형벌이 두려운 것임을 깨닫게 하고, 범죄의 이익보다 형벌의 불이익이 더 크다는 것이 선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회 속에 있으면서, 공공연한 장소나 대로에 노출된 수형자는 이익과 의미를 만들어 내는 근원이 된다. 그는 가시적인 모습으로 개개인에게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만인의 정신 속에 범죄가 바로 징벌이라는 기호를 남몰래 주입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기호야말로 이차적인 효용성인 셈인데, 이 효과는 완전히 정신적인 것이지만, 참으로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DP, 209~210)." 개인을 완전히 바꾸는 개조의 과정은 개인에게 강제되는 매일의 노동을 통해서 그의 신체 및 습관을 개조하고, 또한 개인을 대상으로 한 정신적 배려를 통해서 그의 정신과 의지를 개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237).


  결과적으로, 행정기관인 감옥은 동시에 정신을 개조하는 기구이다. 수형자의 효과적인 교정을 위해서 그를 관찰하고, 상세히 기록한다. 그 결과, 그에게 맞는 맞춤형 훈육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감옥은 ‘지식의 장치’로서 작용한다. 다른 의미로 처벌은 어떤 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징벌은 기간, 성격, 벌의 경중, 징벌이 이루어지는 방법 등에서 개별적 성격에 영향을 받고 그 벌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을 주는 정도에 따라서 조정되어야 한다(241).     


  따라서 감옥에는 두 가지 주요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사회 계약상의 법적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며, 둘째로, 그 어떤 권력의 일반적이며 동시에 세부적인 모든 형식에 순응하는 복종의 주체를 만드는 것이다.     


감옥의 한계

  그러나 감옥은 출현 이래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범행은 더 잦아졌으며, 범죄자들의 교화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감옥이 범죄발생률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즉, 아무리 감옥을 확장하고 늘리고 변화시킬 수 있다 해도, 범죄와 범죄자의 수는 일정하거나 오히려 더 증가한다는 것이다. … 범죄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재범의 수가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늘고 있다(DP, 479~480).” 


  "구금은 재범을 유발한다. 다시 말해서 죄수들은 감옥에서 나온 뒤에 그곳으로 다시 들어갈 기회가 이전보다 더 많아진다. 결과적으로, 감옥은 교정된 개인들을 석방하기는커녕, 위험한 범죄자들을 주민들 속으로 분산시켜 놓는 것이다. 감옥은 어김없이 범죄자들을 만들어 낸다. 감옥이 범죄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수감자들에게 부여한 생활방식 때문이다. … 감옥은 또한 수감자들에게 극단적 부자유를 강요함으로써 범죄자를 만들어 낸다. 뿐만 아니라, 감옥은 범죄자들이 서로 연대하여 위계질서를 이루고 미래의 모든 공범관계를 준비하는 범죄자 집단의 조직을 만들 수 있고,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을 조장한다, 결국 수감자들은 석방된 후에 부과되는 여러 가지 악조건 때문에 운명적으로 재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감옥은 수감자의 가족을 빈곤상태에 빠지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범죄자를 만들어 낸다(DP, 481~5)." 결국 푸코는 감옥이 교정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고, 그곳에서의 행형기술은 초보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비판하며, 교정에 역점을 둔 감옥에서 징벌의 효력이 상실되고 진정한 행형기술은 가혹한 행위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감옥의 대안

  결국 감옥은 그 탄생목적을 이루지 못한 실패작에 불과한 것일까? 감옥은 범죄를 근절하기보다는 범죄를 재생산하며,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향연의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범죄자는 출소 후에도 범죄에 가담하게 되고, 재구속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렇다면  감옥이 위법 행위의 근절보다 그 반대로, 경제적 유용성과 정치적 생산성을 고려해 위법 행위를 통제하고 위법 행위의 균형이 일정하게 유지되게 기능하는 것은 아닌가? 따라서 위법 행위를 관리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 형법제도를 이해할 수 있다. 감옥은 위법행위를 만들어내고 범죄를 만들어내는 모든 제도 중 가장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제도이다(SP, 36~7).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옥은 제도화된 위법 행위입니다. 따라서 서양 국가가 불법을 억제한다는 핑계로, 준법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마련한 법적 장치의 중심에는 끊임없는 위법 행위를 연료 삼아 작동하는 기관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41).”


  그래서 푸코가 몬트리올대학교 강연에서 말하고자 하는 감옥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감옥의 대안은 없다. 그의 사상에서 감옥의 대안을 찾으려면 "권력층이 위법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를 정말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먼저 찾아야 하는데, 푸코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푸코는 수감자를 개심시키지 못한 감옥의 실패를 지적하며, 감옥이 그곳을 드나드는 이들에게 불명예의 낙인을 찍으며 ‘범죄 학교’ 구실을 하는 만큼 구금형이야말로 재범자를 만들고 그들을 관리 대상자로서 사법 체계 아래 두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감옥은 일하지 않던 이들을 다시 일하게 하고, 사회에서 기피되는 자들을 이동시키고, 권력층을 위한 인력 창고를 만들고, 이들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영구적인 낙인을 찍는다. 결과적으로 구금은 절대로 위법 행위를 없애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72).


Reference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역, 나남, 2020. (DP);

________, 『감옥의 대안』, 이진희 역, 시공사, 2023. (SP);

오생근, 『미셸 푸코와 현대성』, 나남, 2013. (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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