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issement du signifiant et du signifié
분명 보이는 건 김밥인데, 써져 있기는 '삼겹살'이다. 삼겹살이 들어간 삼겹살 김밥인가? 아니면 반찬을 밥 위에 말고, 김으로 싸서 원기둥 모양으로 자른 저 음식을 저 가게에선 삼겹살이라 부르나?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삼겹살 사진과 이름 위에 김밥 사진을 덧붙인 것이기 때문에 삼겹살이라는 저 문자는 잊혀야 할 기표(signifiant)이다. 나도 이미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한번 진지하게 김밥을 삼겹살이라고 칭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상상을 한번 해보았다.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은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의 비(非) 고정성에 대해 논했다. 라깡을 모른다면 정신분석학자가 왜 언어학을 논했나 의아할 수 있다. 그런데 라깡이라는 정신분석학자에게 언어학은 중요하며, 이것을 통해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했다. 라깡의 사상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깡은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을 연구했다. 라깡의 이론은 후기 구조주의로 분류된다. 들뢰즈, 푸코, 데리다와 같은 다른 구조주의자들처럼 구조주의자로 분류되는 걸 부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언어학적으로 어떤 말을 했냐면, 기표와 기의는 불변의 고정된 관계가 아니라는 거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우연이며, 그들 사이의 필연성은 없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는 언제나 미끄러질 수 있으며, 소쉬르에 의하면 기호의 가치가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사유는 데리다의 차연과도 비슷한 것 같다. 기호의 의미는 구조 안에서 고정된 것이고, 개인이 사용하는 의미나 받아들이는 의미는 이러한 구조의 효과라는 것이 소쉬르의 언어학이 구조주의 사상의 시발점이 되었다. 어쩌면 프로이트와 소쉬르 사이의 변증법의 진테제(Synthesis)가 라깡일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이유? 아무 의미 없다. 그냥 삼겹살이라는 기표와 김밥이라는 기의가 한 곳에 공존하는 것이 재밌어서 마그리트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푸코 말대로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로 해석이란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세상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대적인데, 어찌 객관적인 해석이 가능하겠는가. 유아론적인 주관이 객관이라 우기며, 프레임 싸움이 격화되는 지금 그탓을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에게 해야 할까?
우리에게 의미란 고정이 아니다. 꼭 그 단어가 그 대상을 가리킬 필요는 없다. 이게 포스트 모더니즘 정신인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모든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은 경계만 허물고,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할지에 대한 방법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김밥은 삼겹살이 되고, 삼겹살은 고기가 되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는 문구를 쓰게 했고, 의미라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행이 지난 이유는 기성사고를 부수기만 하고, 그 대안을 주지 않는 포퓰리즘적인 사기에 불과했기 때문인가?
삼겹살이란 글자와 김밥의 사진을 보고 주저리주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