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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Dec 06. 2023

시뮬라시옹 사회

Société de simulation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1889~1967) - <금지된 재현>(1937)

  기술복제시대의 도래 이후 더 이상 원본이라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뒤샹은 프로펠러를 보고 말했다. "이제 예술은 망했다. 저 프로펠러보다 멋있는 것을 누가 만들겠는가?" 모든 학문의 뿌리였던 철학도 과학, 심리학, 정치학 등 수많은 분과학문으로 나뉘면서, 그 굵은 위엄이 과거에 비해 많이 가늘어졌다. 카메라의 등장이 예술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 확신은 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복제기술의 등장도 회화의 입지를 많이 좁혀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원본과 복제품의 위계질서는 더 이상 소용이 없으며,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도 그러한 것 같다. 철학이 자연철학에 불과하던 과학에 왕위를 빼앗기고, 아름다움이라는 절대군주가 내려오고 미학적 민주주의가 시작함으로써 복제가 원본을 넘는 시대가 열렸다.


  이 글에서는 기술복제시대에 기술이 원본(자연)을 넘은 상황을 알아보면서, 현재 어떤 현상들이 펼쳐지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기술이 원본을 초월한 경우는 크게는 두 경우로 볼 수 있다 생각한다. 기술은 자연이라는 원본을 초월했으며, 인간의 본성인 섹슈얼리티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시각, 청각, 미각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포르노와 리얼돌에 대해서 알아보려 한다.


감각과 시뮬라시옹

  감각은 오감이라고도 불린다.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매체가 발달함에 따라서 인간의 감각이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를 행한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감각 매체에 대해서 회의와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직 오감의 모든 감각에 디지털 기술이 영향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시각은 모니터에, 청각은 이어폰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더 언급하자면, 우리의 촉각은 키보드 혹은 터치 스크린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촉각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여기서는 시각, 청각, 미각에 대해 다루겠다. 미각은 디지털의 영향 밖이지만, 사카린의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 끼워 넣었다. 다행히도, 미각과 후각은 아직 컴퓨터로부터 자유로운 것 같다.


시각의 시뮬라시옹

Apple이 2023년 6월 WWDC23에서 발표한 Apple의 1세대 AR 모델 "Apple Vision Pro"

  사람들이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집돌이, 집순이가 되었고, 컴퓨터의 등장으로 거북목이 되었으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눈뜬장님이 되었다. 아 물론 디스플레이의 발달이 주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호의는 권리인 줄 아는 동물이니 그 부분은 생략하겠다. 분명히 요즘 사람들은 눈이 좋다. 영양제도 잘 챙겨 먹고, 시력교정술도 아주 정교하다. 근데 왜 사람들은 눈뜬장님일까? 


  그 이유는 스마트폰을 보느라 앞을 못 보기 때문이다. 걸을 때에도 보고, 서있을 때도 보고, 앉아있을 때도 보고, 누워있을 때도, 심지어는 운전하면서도 보는 사람이 있더라. 왜 원본인 현실세계보다 그 세계를 재현한 가상에 불과한 영상 혹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스마트폰을 더 많이 볼까? 재밌는 게 많아서일까? 그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는 게임을 하느라, 누구는 연락을 주고받느라, 누구는 유튜브를 보느라, 누구는 스마트폰으로 공부를 하느라 그럴 것이다. 이유에 대한 부분은 따라서 보편적인 결론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세계보다 그 재현과 가상에 불과한 것에 시선을 더 준다는 것은 결론으로 볼만하다. 


  이제는 스마트폰 한대가 신문, 카메라, 메모장, 전화기, 타자기, 게임기, 시계 등 수많은 원본들을 초월한다. 심지어는 컴퓨터도 초월한다. 스마트폰이 핸드탑(Handtop)으로 분류될 수 있으니 컴퓨터가 자기 자신을 초월했다고 봐야 할까? 아무튼 스마트폰의 화면은 현실 세계를 초월한 무언가가 되는 것 같다. 겨울에 꽃이 보고 싶으면 봄이 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냥 검색만 하면 꽃이 바로 나온다. 심지어 종류와 색상도 너무 다양해서 고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화면 안에서는 밤낮, 계절, 시대, 공간이 상관없다. 뭐든 검색만 하면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터넷으로 수많은 것을 한다. 대부분의 자료는 그곳에서 스크랩하며, 이제는 정보의 근원이 되었다. 


  이제 여행도 직접 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브이로거와 여행 유튜버들이 대신 비싼 비행기 값과 호텔값을 지불하면서 우리에게 그 장면들을 공유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공연도 직접 보러 갈 필요가 없어질까? 물론 공연에 가면 그 분위기와 아우라에 압도당해 큰 행복과 황홀감을 느끼지만, 집에서 유튜브로 보면 다른 공간에 있더라도 더 편안하고, 또렷하게 아티스트를 볼 수 있다. 


  직접 보러 가는 것보다 내 손안에 있는 도구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쉬운 지금, 우리의 시각은 원본보다 그 재현인 가상에 더 쏠려있다.


청각의 시뮬라시옹

애플의 무선 이어폰 에어팟 프로(Airpods Pro)

  애플이 2016년에 큰 결단을 내렸는데, 그 나비효과가 여전히 대단하며, 앞으로도 그 파급력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 결단은 3.5pi 이어폰 포트를 없앤 것과 소비자에게 무선 이어폰을 권장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지하게 욕을 많이 먹었다. 기존의 당연하던 것을 제외시켜서 소비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점과 무지하게 비싼 무선 이어폰을 강매한다고 느낀 소비자들이 그러한 애플을 곱게 보지 못하는 점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애플의 이러한 선택은 성공했고, 다른 브랜드들도 같은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후에 무선 이어폰은 당연한 생필품이 되었으며, 유선을 쓰는 사람이 더 특이한 사람이 되고 있다.


  무선 이어폰의 장점이라 함은 무엇보다도 선이 없어서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선이어폰을 착용하고 운동을 하거나 꿈을 추든, 그 어떤 행동을 해도 꼬일 선이 없다. 가벼운 착용감과 부담 없는 무게로 인해서 무선 이어폰을 써본 사람들은 그것만 찾게 된다. 


  그래서 문제가 뭐냐면, 사람들이 모든 소리를 원본이 아니라 복제본으로 듣는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폰을 착용하지 않더라도, 스피커를 통해서 나온 소리를 듣는다. 사람소리, 자연소리, 음악소리 등 많은 소리들을 원본으로 직접 듣지 않고,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 가상본으로 듣는다. 자연의 소리를 들을 일이 가뜩이나 없는데, 스피커로 나마 듣는 게 어디냐!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다. 어쩌면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우리는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세상 자체에 원본의 개념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피커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는 게 윤리적으로 어긋나지도 않으며, 그것으로 인해서 소통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발생한다. 귀를 틀어막고 있어서, 주변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어서,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생긴다. 분명 이어폰을 사용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며, 그 누구도 그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를 막고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않으니 교통사고 등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 


미각의 시뮬라시옹

  식습관의 서구화와 과한 당 섭취로 인해서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제조사들은 설탕 대신에 아스파탐과 같은 인공 감미료를 통해서 단맛을 내는 동시에, 당류와 칼로리가 '0'인 음료를 선보이게 되었다. 최근에는 아스파탐이 발암물질이라는 논란이 있었는데, 아스파탐이 발암물질이 되려면 하루에 제로콜라를 몇십 리터 마셔야 한다고 하니 일정량을 섭취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제로의 시작은 콜라였다. 코카콜라에서 제로콜라를 다이어트 콜라 개념으로 출시한 것이 내가 본 첫 번째 제로였다. 그 후 펩시콜라도 제로 콜라를 선보였으며, 그 후 콜라뿐만 아니라 사이다, 이온음료 심지어 아이스크림과 쿠키, 비스킷 같은 과자까지 제로 식품이 나왔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긍정적으로 본다. 아무리 건강에 좋지 않아도 단맛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세상에 맛있는 게 너무 많다 보니 그 유혹을 포기하는 건 무진장 어렵다. 그런데, 제로 식품이 기존의 설탕 함유식품을 넘어서는 이 현상은 우리의 건강 걱정을 덜어주면서, 그 맛을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많이 먹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쨋든 아스파탐이라는 설탕의 복제품이 그 원본을 뛰어넘는 이 사회적 현상은 시뮬라시옹의 긍정적 효과라고 말하고 싶다. 원본을 초월한 복제로 인해서 우리는 건강에 대한 부담도 줄었으며, 그것을 더 기분 좋게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섹슈리얼리티와 시뮬라시옹

  의사소통이 쉬워진 만큼, 정보의 접근이 쉬워진 만큼 우리는 포르노그라피(pornograffi)도 너무나 익숙하고, 접근하기 쉬운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섹스는 본능과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항구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욕구를 혼자 해결해도 원본(섹스) 보다 더 적은 쾌락을 얻을 것이다. 무엇보다 파트너와의 성관계는 상호의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인간의 가장 농밀한 모습을 보이는 성적인 순간에 인간은 그 욕구에 충실하고 싶고, 솔직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고 싶지만, 양방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표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섹슈얼리티의 시뮬라시옹은 그러한 음지에 감춰진 욕망을 해결하게 도와준다. 기구와 같은 물질적인 것, 영상이나 음성 같은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 혼자서 원하는 바를 다 해결하게 해 준다. 그러한 섹슈얼리티의 시뮬라시옹은 여러 사례가 있을 것이다. 성매매, 포르노, 성인기구, 리얼돌 등. 그것들은 한 개인의 은밀한 욕망을 모두 해소시켜 주며, 성적으로 솔직한 모습을 보이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원할 때면 언제든 그의 파트너가 되어 욕구를 해소시켜 준다. 


  하지만 문제도 있다. 그건 사람들이 자극적인 시각매체에 의존하여 욕구를 해소하다 보니 더 큰 역치의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담배도 시작할 때는 1미리짜리를 피지만, 필수록 더 센 것을 원하게 되는데, 성적 욕구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던 대로 항상 혼자 해결하던 사람은 막상 원본(현실의 섹스)에서는 그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해서 복제본보다 못한 쾌락을 느끼며, 불만족해한다. 이때, 복제본으로 인해서 자극에 익숙해진 그 사람은 더 큰 역치의 쾌락을 원하지만, 원본은 그러한 양의 쾌락을 주지 못한다는 모순이 생긴다. 따라서 개인은 원본을 원하지만 원본으로는 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고, 이 악순환은 계속된다. 


  포르노그라피의 보급이 낳은 이 악순환은 개인의 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뉴스에 나오는 엽기적인 성범죄나 문란한 성풍속 등 해소되지 못한 리비도(Libido)가 부도덕적인 혹은 지나치게 외설적인 형태로 승화됨으로써 사회적 문제가 된다. 포르노그라피 즉, 섹슈얼리티의 시뮬라시옹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었지만, 동시에 더 큰 쾌락을 원하게 하는 마약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은 아닐까?


결론

  시뮬라시옹은 보드리야르의 이론으로, 원본을 넘어서는 복제를 말한다. 기술복제시대 이래로, 원본보다 복제가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는데, 많은 장단점을 일으켰다. 원본의 가치를 절하해서 복제본에 의존하게 되는 현상 혹은 원본의 애로사항을 넘는 복제본에 의해서 우리는 원본을 향유하던 시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원본과 복제본의 경계를 허물음으로써 그 위계질서를 해체하려 했지만, 그 해체 이후의 대안은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질서와 위계를 무조건적으로 해체하는 것은 결코 답이 될 수 없었다.


 복제본의 해방과 원본의 군림은 양립할 수 없다. 양자는 논리적으로도 어긋나며, 복제본이 없다면 원본은 군림할 수 없다. 또한 복제본도 원본 없이는 해방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때론 원본이 그저 원본이라는 이유로 선호되고, 복제품이 원본과 다를 바 없다는 이유로 그 위계가 무너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제와 원본의 경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허물자니 그 후의 무질서가 문제고, 그렇지 않으면 그 위계질서가 무의미하고 권위적인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라 비판하게 된다. 그 문제는 마치 푸코와 하버마스의 토론을 방불케 하는 창과 방패의 대결과 같다. 때론 푸코가 맞고, 때론 하버마스가 맞듯이 우리는 융통성 있게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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