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Jan 31. 2024

종교와 종교가 아닌 것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 - <의심하는 도마>(1602)

  종교란 무한(無限)·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성하게 여겨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 혹은 초월적, 선험적 또는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와 그들이 가진 신앙 체계나 문화적 체계(cultural system)를 말한다. 과거 종교의 영향력은 현재보다 막강했다. 철학은 종교의 시녀였으며, 성직자는 권력자들의 영역에 닿지 않는 존재일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중세에도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자들이 있었다. 그 논재을 보편논쟁이라고 하는데보편(신)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와 보편과 개별에 대한 우위 여부를 두고 벌어진 철학적 논쟁을 일컫는 말이다. 고대 철학에서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나뉘어 가장 격렬하게 논의되었다.  아무튼 신과 종교는 인간과 떼레야 뗄 수 없는 것들이다. 자타공인 '신'이라 인정받는 존재가 출현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꼭 의문을 품고 그의 자질을 의심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신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길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매일 숭배를 하며 소원을 빌어도 이루어질 확률이 극악임에도 왜 그 불분명한 존재를 믿고 그 존재를 변호하고자 할까. 가장 확실한 이유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신이라는 존재가 실제 하는지 아니면 그저 이름 존재하는 허상인지조 차도 우리는 명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먼저와 같이 작은 존재이며, 자신의 고향인 지구라는 행성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했다. 물리적인 존재에 대한 규정도 아직 완벽히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형이상학적인 존재인 신에 대해서 논하고 결론을 내리겠는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서 종교와 철학의 지위가 격하된 지금도 인간의 유한성 때문인지, 종교와 철학은 그 숨을 이어가고 있다. 종교는 아직도 활발하게 연구될 학문적 대상이며, 아직 인간은 그 학문을 완성하고 결론짓기에 부족한 존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이 종교에 대한 종교적인 내용을 다루는 글은 아니다. 그러한 글을 쓰기에 난 종교에 대해서 많이 모른다. 그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 관점으로 종교를 다뤄보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고 스콜라 철학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늘 하던 대로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유를 통해서 종교에 대한 해석을 해보려 한다. 


신(神)과 이분법

  인간은 둘로 나뉜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로. 한국,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이집트, 브라질 등 수많은 국가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나눌 때 그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 할 때, 신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도움이 될 것이다. 종교는 다를 수 있다. 불교라서 부처님을 믿을 수도 있고, 기독교라서 하느님을 믿을 수도 있고, 무슬림이라서 알라를 믿을 수도 있다. 이들처럼 어떤 초월적 존재를 믿는 자들은 누구를 믿던지 간에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 자들을 또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적, 인종, 신분, 학벌 등 수많은 것들을 초월하는 분류로써 신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볼 수 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누가 옳은지는 모른다. 어쩌면 이 논쟁을 지켜보는 신은 그 답을 알고 있을 텐데, 그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 옳은지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 때문에 판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며,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제3의 관점이 있다. 바로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자들이다. 이들은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그 존재의 여부를 "Yes"와 "No"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고, 묵언으로 응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을 둘로 나눌 수 있다는 나의 야심 찬 계획은 틀렸나 보다. 불가지론자들이 그들의 신에 대한 명확한 신념을 표현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제3의 존재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관중일지도 모른다. 무신론과 유신론이 논쟁하는 것을 바라보며 어느 쪽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지 기대하는 관중. 사회를 경기장에 비유한다면, 어쩌면 그들은 유신론과 무신론이 승부를 내는 것을 구경하는 관중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들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둘로 나뉘더라. 특히나 남들보다 더욱 본질에 대해 충실한 그들은 이 문제에 가장 관심이 많을 것이다. 때문에 불가지론을 제외한 철학 사조들 또한 신의 존재에 대한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이데아를 주장한 플라톤, 신학대전을 쓴 아퀴나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르, 아우구스티누스, 레비나스와 같은 신(혹은 초월적인 존재)을 믿는 자들과 푸코, 사르트르, 하이데거, 데리다, 들뢰즈, 니체와 같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로 크게 나눌 수 있겠다. 

  종교의 지위가 격하되고, 과학을 통해 세상이라는 현상을 해석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요즘은 무신론적인 입장이 더 우세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인간의 한계와 미지의 영역의 존재로 인해서 종교는 소멸하지 않는다.


종교의 교리와 진리

  종교의 교리는 신자에게 진리와 같다. 교리는 의심의 대상이 아니며, 이유도 묻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다. 그래서 같은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같은 교리를 따름으로써 같은 진리를 추구하고, 믿는다. 여기서 종교의 교리가 진리라는 점을 더 다뤄야겠다. 두 종교의 진리는 같을 수가 없다. 만약 그들의 최종적 진리가 같다면 그들은 이미 하나의 종교였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마다 추구하는 진리가 절대적 진리란 다를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서 각각의 종교 사이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예수를 예로 들어보자. 기독교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숭배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 예수는 예언자이다. 과연 독실한 기독교 신자와 무슬림이 예수의 존재에 대해서 토론을 한다면 그들은 서로의 진리를 인정할까? 아마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의 위치가 그 종교의 교리이자 진리이기 때문이다. 대체 그 진리라는 게 뭐길래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여기서 진리란 동일자 자신이 발행하는 동일자의 보증서이다. 자신이 그와 같은 교리를 진리로 여김을 증명함으로써 타자에게 자신을 동일자라고 인식시키는 것이다. 같은 신을 믿음으로써 자신을 그들과 같은 집합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어느 종교의 교리 혹은 진리를 비유하자면, 푸코의 에피스테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의 룰, 리오타르의 메타서사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종교라는 언어게임 안에서 같은 메타서사를 따르는 것. 그것이 현대철학의 입장으로 본 종교가 아닐까?


종교와 타자

  어느 종교의 타자란 그 종교 밖의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알라신을 믿지 않는 자 등 그들의 교리를 진리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 』(1961)에서 광기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를 수행하는데, 이때 로피탈 제네랄(L'hôpital général)이라는 수용소에 주목한다. 나병의 유행으로 인해서 설립된 수용소가 나병의 완화로 텅 비게 되자, 이곳은 "사회가 설정한 지배적 정상성 범주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중에는 무신론자도 있었다. 종교의 영향이 막강했던 시대라서 종교라는 이성의 반대편인 무신론은 광기로 인식되어 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로피탈 제네랄의 목표는 사회 구성원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도덕적 교정이었다. 난봉꾼, 얼간이, 방탕자, 불구자, 머리가 돈 자, 방종자, 배은망덕한 자식, 재물을 낭비하는 아버지, 매춘부, 미치광이, 동성애자 등 비이성의 영역에 있는 자들을 이성의 품으로 되돌리는 게 그 목표였다. 그래서 무신론자는 그곳에서 신자가 되기 위한 교정을 받았다. 고전주의 유럽이니 지금이랑은 너무나도 다른 얘기지만.


  하지만 지금도 종교와 타자의 문제는 계속된다. 적극적인 포교와 선교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동일자를 늘리려 한다. 그들에게 이교도나 무신론자는 모두 포섭의 대상이다. 물론 모든 종교와 교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극단적인 종교의 일부 광적인 신도들이 그럴 뿐. 하지만 일부 종교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틀림으로 치부하고,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교정하려 하더라. 종교에게 타자란 환대의 대상인가 아니면 교정의 대상인가. 물론 종교마다 다를 것이다. 종교와 타자의 문제는 좀 더 심층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종교의 역할

  종교의 역할은 무엇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신의 은총을 받고 자신감을 얻는 자,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양심의 안정을 되찾는 자, 종교라는 울타리에 들어옴으로써 소속감과 인간관계를 얻는 자와 같이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결핍과 불안을 해소하려 한다. 종교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아도, 믿는 것만으로도 큰 안정감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매주 교회에 가고, 식전에 기도를 하며, 헌금을 낸다. 

  사이비 종교도 이러한 프로세스로 신자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그 정도가 기성 종교들과 다르다. 기성 종교와 완전히 다른 비상식적인 요구 사항과 함께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주는 척한다. 그리고 더 큰 역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신자들은 더 많은 것을 내다 바치며, 자기 자신마저 내어 준다. 


마치며

  종교를  내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염려와 불안을 막아주고, 타자와 같은 진리를 믿음으로써 그 불안을 희망으로 바꿔주는 것. 같은 진리를 추구하며 동일자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문화적 체계. 종교란 결국 인간의 유한성에서 유발되는 결핍과 미지로 인해서 발생한 것은 아닐까? 기상청이 있는 지금은 왜 비가 오며, 언제 비가 올지 알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비가 오게 해 달라며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물까지 바쳤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그런 종교적 의식은 미신이 되었다. 인간이 모르는 영역은 종교적 추측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영역을 인간이 간파하게 되면 과거의 의식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인간의 미지와 두려움 마저 해소된다면 인간에게 종교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네이버 블로그


주인장 신작,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작가의 이전글 아리스토텔레스 미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