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le aesthetics
어쩌면 그가 없었다면 서양철학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그의 스승은 플라톤이며, 그의 스승의 스승은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다. 그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창 시절 공통과학, 윤리와 사상, 도덕 등 많은 과목들에서 들을 수 있는 이름이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친구들끼리 이런 얘기도 나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과학이랑 도덕에 둘 다 나오지?" 그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저 중고딩들 귀찮게 하는 고리타분한 옛사람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철학사를 공부하니까 더더욱 피할 수 없는 사람이더라. 그리고 미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는 다른 입장을 펼쳤다.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하는 이 세계는 거짓이며, 오직 참된 것들의 세상인 이데아만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우리가 있는 이 현실세계만이 진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형상, 질료 이론을 보면 결국 그의 스승의 이론으로 귀결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인식론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학에서도 플라톤과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에 대해 논할 때도 진정한 아름다움과 모방으로서의 아름다움을 구분하며, 전자를 참에 놓고, 후자를 거짓의 자리에 놓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아름다운 예술이란 그와 다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예술”이란 단어는 우리가 오늘날 “순수예술”이라고 표현하는 화가, 조각가, 무용수, 비극작가의 활동뿐만 아니라 건축, 치료, 항해 등의 기술도 가리킨다(AP, 59). 이 글을 쓰는 행위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개념에 포함될 수도 있다. 그에게 예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건축은 현대인의 입장에서 예술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치료와 항해? 이건 대체 어떤 이유로 그의 예술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아니, 그가 정의한 예술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란 일반적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능력이지만, 그 원칙은 작품이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안에 거주한다고 자주 언급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본질적으로 제작에 관한 것이지 행위와 직접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AP, 59). 그렇다면 치료와 항해는 행위자의 머릿속에 있는 형상을 실현하는 행위이므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미학적 관점을 통해서 그 행위들을 예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 머릿속의 사유를 텍스트화시키는 글쓰기도 예술이며, 뒤샹이 서명한 변기도 예술일 것이다. 그리고 머릿속의 구상대로 축구공을 슈팅해서 득점하는 손흥민도 예술가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생산물과 예술적 생산물을 구별하였다. 예술은 인간에게만 적합한 분야이다. 왜냐하면 자연이 생산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예술의 산물은 ‘우연적’이다(60). 자연도 아름다울 수 있다. 바다의 파란색, 휘날리는 낙엽도 우리에게 쾌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예술과 다르다. 그것들은 어느 대자존재의 정신의 실현 혹은 행동화가 아니라, 그저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들이다. 바다가 파란 것은 누군가가 의도해서 칠한 것이 아니고,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 또한 누군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예술은 창작자의 의도가 들어간 행위이므로, 자연의 필연적인 현상과는 다르게 결정되어있지 않은 우연적인 사건이다. 단풍잎이 붉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예술작품을 만들 때 우리는 그 대리석이 어떤 조각상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어떤 작품을 만들지 기대하게 되며, 그 기대는 정해져 있지 않은 우연성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으로 인한 원인과 결과의 비확정성 또는 우연성이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즐거움을 주는 예술은 여타의 ‘예술들’과 다른 정확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들은 관객들을 교육해야 하며 도덕적, 지성적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음악, 시, 비극은 이런 식으로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정신의 휴식을 통해 개인 교육에 기여한다(61).” 플라톤이 예술을 정치적 이성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예술이 관객들을 교육시키는 것을 그 본질로 생각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예술의 검열과 삭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플라톤에게 예술이란 이데아의 형상을 암시하는 현실세계의 매개체로, 그 외의 거짓을 내포하는 예술이란 그에게 추방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이란 관객을 교육하는 용도로 쓰는 것이므로, 그 사실성에 대한 진위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 것을 보인다.
“예술의 본질이 모방이라면 이것은 또한 쾌를 목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이 모방하는 것은 항상 마음에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아나가 우리가 현실에서 관심을 갖지 않던 것, 우리를 불쾌하게 했던 것도 예술에 의해 즐겁고 흥미로운 것이 된다(62-3).” 평소에 관심이 없었던 꽃병, 그림의 프레임 등 우리는 어떤 대상을 그 자체로 관조하지 않고, 부수적인 조연으로서만 취급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대상들이 예술을 통해서 우리에게 현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쾌를 느낄 수 있다. 평소에 관심 없던 대상을 그렸더라도, 그 대상과 얼마나 비슷하게 모방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큰 쾌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모방에 의한 재현에 쾌감을 느낀다. 실물은 보기에 괴로운 존재들도 매우 정확하게 그려진 그림으로 보면 우리는 좋아한다. … 그림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바라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이다. 어떤 형상이 어떤 사람을 그린 것인지 알아보는 것처럼 각 사물이 무엇인가 추리하기 때문이다. (『시학』, 1448b)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과 자연을 비교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자연이 성공시키지 못한 것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예술은 자연의 있을 수 있는 결점을 보충한다. 또한 예술은 자연이 직접적으로 부각시키지 않거나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것을 보게 해준다. 이 점에서 예술가는 자연을 앞지르고 더 나아가 능가한다(64). 그런 면에서 예술가는 사실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이상주의자이기도 하다. 예술은 실제를 변형하여 이상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65).
우리는 평소에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정확히 알거나 이 단어의 기원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더라. 카타르시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정화[purification]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배설[purgation]의 의미도 갖고 있다(67).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정념이나 영감을 배설하며, 그 작품을 본 관객은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예술가의 행위와 관객의 반응을 모두 카타르시스라고 한다. 관객과 예술가 모두 예술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같은 단어지만,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예술가의 경우, 능동적인 카타르시스라고 볼 수 있고, 관객의 경우는 수동적인 카타르시스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예술가 혹은 창작자에게 "예술은 혼란한 영혼에게 배설, 휴식의 기회가 될 수 있다. … 카타르시스는 치료, 즉 육체와 정신의 건강에 속한다(68-9)." 창작자는 자신의 배설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 카타르시스는 그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 카타르시스의 치료는 창작자 본인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해당된다.
“비극이 우리 안에서 불러 일으키는 정서인 연민과 두려움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화해시키며 인간이 살고 행동하고 있는 우주와 화해시킨다. 즉 비극에 의해서 인간은 그가 처해 있는 더 깊은 의미에 접근하며 고양되고, 자신을 반성하므로 순수해지고 정화된다. 그러므로 예술은 미학적인(마음에 들므로) 동시에 형이상학적(실재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므로)이다(69).”
비극의 관객은 주인공이 던지는 질문들을 다시 받을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운명과 내면에 대입시킴으로써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된다(71).
예술가는 작품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 감정을 배설하고 작품을 감상하고 감동받은 대중은 영혼을 정화받는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는 것 같다. 그럼 우리는 예술가의 감정의 배설물을 보고 어떻게 스스로 각자의 영혼을 정화할 수 있을까? 나는 제목이 던지는 질문이나 답을 찾는 과정이 영혼의 정화라고 생각한다(RD, 275).
작품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져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내거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면 당신은 작품을 통해서 수동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의 작품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결과물을 내놓으며, 쾌를 느낀다면 당신은 능동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이다. 예술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둘로 나뉜다. 예술을 관조하거나, 예술을 행하거나. 이 둘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더라도, 카타르시스는 빼놓을 수 없다. 결국 카타르시스가 예술의 본질이며, 우리는 그 본질을 위해서 예술을 행하거나 남의 예술을 관조하는 것은 아닐까?
시릴 모라나 · 에릭 우댕, 『예술철학』, 한의정 역, 미술문화, 2019. (AP)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오경수,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퍼플, 2024. (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