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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an 09. 2024

푸코와 리오타르

에피스테메와 메타 서사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푸코와 리오타르. 20세기 프랑스 지성사를 논할 때, 이 두 명의 거장을 피하기 힘들다. 이성의 독단성을 공격하고, 지식과 권력의 근원을 폭로하는 푸코와 메타서사의 불신을 통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리오타르는 둘 다 프랑스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도 소르본대학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마 푸코는 거부하겠지만, 둘 다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인식된다는 점도 그들의 교집합일 것이다. 리오타르를 제외한 나머지 철학자들은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스트임을 부정하는 학자들의 사유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규정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오타르는 스스로 포스트 모더니스트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에서 푸코와 리오타르의 사유에서 공통적인 지향점을 찾고, 그 방법을 비교해보려 한다. 푸코의 경우엔 에피스테메(épistémè)를 통해서 다루고, 리오타르의 경우엔 메타 서사(Meta narrative)를 통해서 다뤄보려고 한다.


에피스테메(épistémè)

  『말과 사물』(1966)은 미셸 푸코의 출세작이다. 이 책은 모닝빵과 같이 불티나게 많이 팔렸다고 한다. 당시의 프랑스 사람들은 휴양지를 갈 때도 저 작품을 가지고 가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도 가져갔다고 한다. 철학의 나라답게 프랑스에서 많은 대중들은 푸코라는 철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의 글은 학자, 학생, 가정주부, 노동자 누구에게나 널리 퍼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결코 읽기 쉬운 것은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너무나도 난해한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푸코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바는 무엇일까? 『말과 사물』은 ‘달력도 지도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푸코 자신의 말대로, 르네상스 곧 16세기부터 이 책이 저술된 1966년까지 유럽의 ‘에피스테메’를 탐구한 책이다. 에피스테메, 또는 인식론적 장이란 '주어진 한 문화 혹은 사회의 모든 지식 일반에 대한 가능조건 또는 인식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인식 가능조건'이라는 광의의 칸트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용어이다(허경, 328). 푸코는 시대마다 각기 상이한 에피스테메를 언어, 생명, 노동의 범주 안에서 찾아냈다. 인간의 '인식 가능조건'을 앞의 세 가지 분과학문에서 찾았다는 것은 푸코가 정의하는 인간이란 말하고, 살아 숨 쉬며, 일하는 존재일까?


  푸코에 의하면 16세기부터 1966년까지 에피스테메의 단절이 두 번있었다고 한다. 그전에 우리는 푸코가 르네상스 이래로 서양사를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알아야 한다. 푸코는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 중반에 끝나는 시기를 르네상스, 17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18세기 중후반에 소멸되는 시기를 고전주의, 18세기말 19세기 초에 시작되어 1966년 당시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근대로 나누며, 르네상스부터 당대까지를 세 개의 시대로 보았다. 따라서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로 넘어갈 때와 고전주의에서 근대로 넘어갈 때 두 번의 단절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 중반에 끝나는 르네상스(renaissance)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ressemblance)이며, 17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18세기 중후반에 소멸되는 고전주의(classique)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재현작용’(représentation), 18세기말 19세기 초에 시작되어 1966년 당시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근대(moderne)의 에피스테메는 ‘역사’(histoire) 혹은 ‘인간’(homme)이다(328-9).” 푸코가 시기구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광기의 역사』로부터 이어져온 자신의 근본적 주장, 곧 말과 사물의 관계는 고정불변하는 비역사적 ‘자연적-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주어진 사회에서 개별적 인식의 내용을 가능케 하는 ‘인식 가능조건 일반의 변화’에 대해 매 시대 새롭게 구성되며, 하나의 지식은 한 시대의 인식론적 배치에 의해 가능하게 되고 또 그 의미가 확정된다는 주장이다(330).”


  푸코는 서양사를 성찰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진정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근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즉,『말과 사물』의 목표는 근대를 끝장내는 것이다. 그는 칸트가 열어놓은 모더니티의 문을 닫고, 새로운 시대(포스트 모더니티)를 니체를 통해서 맞이하고 싶어 했다. 푸코에게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청산해야 할 과거의 빚이었다.


메타 서사(Meta narrative)

  전체주의에 반감을 품은 리오타르의 철학적 사유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 열외자 등의 권리와 인권을 되찾기 위해 모든 전체주의의 테러를 근절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면에서 푸코의 사유와 비슷한 지향점을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메타 서사에 대한 사유를 알 수 있는 저작『포스트모던적 조건』은 ‘선진 사회의 지식에 관한 보고서’이며, 이 책의 주제는 모던적, 계몽적 사회에서 정립된 지식 개념이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는 어떻게 변형되어 있고, 또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탐색하는 것이다(이철우, 378). 


  메타 서사를 알기 위해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간략하게 말해서 어느 한 집단에서 하나의 발화는 게임 속에서의 하나의 수와 같은 역할을 하며, 같은 발화라도 다른 집단 속에서는 다른 효과의 수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막에서 "물이다!"라고 외친다면 그건 물을 찾아서 기쁘다는 감정 혹은 이제는 물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 등을 나타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폭우가 심각한 상황에서 지하에 갇혀있던 어떤 사람이 "물이다!"라고 외친다면, 그 경우는 앞의 경우와 반대일 것이다. 전자에서 물이란 긍정적인 존재였다. 그것을 추구해야만 했으며, 필요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물은 나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공포의 존재다. 필요하지 않은 존재이며, 오히려 나에게 걱정을 유발하는 요소이다. 이처럼 동일한 언어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내포하며, 완전히 다른 의도를 띄게 된다. 근본적 귀속오류와 같은 상황에서 우린 이를 잘 체감할 수 있다. 


   '사이코'라는 말은 한국에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칭하거나 비하할 때 쓰는 '파롤'이다. 하지만 일본어 "さいこう("사이코"라 발음)"는 '최고'라는 랑그의 파롤이다. 한국인이 친구에게 "사이코"라고 한다면 비하이지만 일본인이 친구에게 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칭찬이다.  그렇다면 한국인 두 명과 일본인 한 명이 만났는데, 일본이 칭찬의 뜻으로 "사이코!"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인들이라면 시비를 거는 것으로 오해를 할 것이다. 반대로 일본인 두 명과 한국인 한 명이 만났는데, 한국인이 그 둘에게 "사이코"라고 욕설을 하면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인들은 칭찬을 들은 것으로 오해할 것이다. 이처럼 파롤은 같지만 다른 랑그를 의미해서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를 근본적 귀속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한다.


  '사이코'라는 하나의 언어는 일본인에게는 칭찬일 것이고, 한국인에게는 부정적인 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이코'라는 게임 속 패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사이코를 칭찬으로 만들고, 무엇이 사이코를 욕으로 만들까? 그게 바로 메타 서사다. 


  메타 서사란 당연하게 사용하던 그것의 효력을 결정짓는 것이다. 따라서 메타 서서에 의해서 언어 게임의 룰이 정해지며, 그 패들의 역할이 결정된다. 리오타르는 그전에는 당연했던 메타 서사에 대한 불신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한다,


  “‘모던’이라는 용어는 지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메타담론(métadiscours)들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면,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19세기말부터 과학, 문학 및 예술의 게임규칙에 영향을 끼친 변형들 이후의 문화상태”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는 이러한 변화들을 이야기의 위기와 관련하여 설정하는데, 모던 사회에서 이론과 실천을 정당화해 주었던 메타담론이나 거대 이야기에 대한 불신이 바로 포스트모던적 사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379).”


공통의 목표

  푸코와 리오타르 모두 지식을 결정짓고, 그 역할을 결정짓는 무언가에 대한 불신을 나타낸다. 그래서 푸코는 근대와 그의 에피스테메를 끝장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하고, 리오타르는 기존의 메타 서사에 대한 불신을 말하며, 새로운 담론의 출현을 요구한다. 회적 약자, 소수자, 열외자 등의 권리와 인권을 되찾고자 했던 푸코와 리오타르. 그들이 학문적으로 교류를 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같은 편에 서서 새로운 담론과 에피스테메를 요구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언어게임의 파괴 혹은 새로운 규칙, 칸트로 대표되는 모더니티를 살해한 니체와 칸트의 시체. 


  스스로 포스트 모더니스트, 구조주의자 이기를 거부한 푸코가 리오타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학문적 노력을 보면 그는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맞는 것 같다. 이 둘은 모두 이성으로 대표되는 절대의 근대성을 끝내고, 다양성이 가능한 사회를 꿈꾼 것 같다.


  이 둘의 거시적인 목표는 비슷해 보이지만 구체적인 방법과 지향점은 다르다. 푸코의 경우, 그는 칸트의 보편적 인간학이 다만 역사적으로 조합된 하나의 구성물임을 밝힘으로써 그것이 주장하는 객관성, 절대성, 필연성 및 보편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그와는 다른 '무수한 일반성의 형식들'을 가능케 하고자 한다. 그리고 칸트의 부정과 동시에 니체의 긍정을 외친다.


Reference

허경, 미셸 푸꼬 : 우리 자신의 역사적, 비판적 존재론, 현대프랑스철학사, 창비, 2015.

이철우, 장프랑수아 리오따르 : 분쟁의 수호자」, 현대프랑스철학사, 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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