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variable called subject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그건 바로 본인이 자유로우며, 자신의 모든 선택의 기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오만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 습득하는 지식, 관습 등 수많은 사회적인 것들이 당연하고 절대적인 것이라 믿는 신화적인 신념 또한 우리를 기만하는 신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들은 변하지 않는 이데아와 같은 상수적 요소일까? 지식, 권력, 주체 이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것들은 역사적 결과물에 불과한 먼지에 불과하다. 역사적 변증법을 통해서 기존의 절대적 지식은 새로 나타난 담론에 그 왕좌를 넘겨주고, 권력이란 저무는 해와 떠오르는 해와 같이 돌고 도는 것이다.
당신의 눈치가 빠르다면 내가 여기서 주체의 허상을 드러낼 거라는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것이다. 어떻게 주체라는 것이 해체가능한 것이며,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인가? 이 질문이 오늘의 주제이다. 주체의 절대성, 선험성이라는 기만을 해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주체(主體). 영어로 하면 "Subect", 불어로는 "Sujet". 자기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부정하는 현대인은 없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건 말건 자기 자신이 주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명제일 것이다. 주체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로 실존주의와 이어진다. 그리고 두 종류의 실존주의자가 있다. "우선 기독교적 실존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들 속에 가톨릭교파의 야스퍼스(Jaspers)와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을 포함시킵니다. 다음으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속에는 하이데거(Heidegger)와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 그리고 저(사르트르)까지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 양자의 공통점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들 모두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고 평가한다는 사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이들 모두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사르트르, 29-30)." 나는 야스퍼스, 마르셀,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에는 조예가 없기에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토대로 이야기를 해야겠다.
인간의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정해진 본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우개는 무언가를 지우기 위해서, 기타는 연주되기 위해서, 이어폰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고 나서 그 본질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본질은 탄생 이전의 목적에 의해서 정해지므로, 아프리오리(a priori) 한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인간은 그의 필요에 의해서 사물을 창조하고, 그 사물에 본질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지우개는 그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지우는 것이 그것의 탄생이유이자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에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자신의 직업에 대해 고민하고, 뭘 하고 살지 고민하는 것처럼, 인간은 본질을 부여받고 잉태되는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서 본질을 고민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 주체성의 출발점을 인간의 이러한 피투성에 근거한다. 본질은 명령과 목적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인간 주체의 시발점이자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는 코기토 명제를 통해서 신을 증명하고자 한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알려진 그의 유명한 명제이자 명언(?)이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을 찾고자 했다. 그의 눈앞에 있는 화로의 모습과 따뜻한 온기는 과연 확실한 것일까? 그는 그것이 어떤 악마를 자기를 속이는 것일 수 있다고 의심했다. 따라서 그것들은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회의하는 데카르트 자신은? 그의 손, 발, 눈, 귀, 입 등 모든 감각은 악마에 의해서 환각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생각하며, 모든 것을 회의하는 자신의 영혼은 그에게 확실한 것이었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신 증명을 위한 첫 번째 디딤돌을 찾았다. 그건 가장 확실한 출발점이자, 자명한 '나'였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자신의 명증성을 확보한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사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데카르트만의 명제가 아니다. 이 명제는 데카르트 이전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도 했던 말이다. 하지만 그 의도는 전혀 다르다. 데카르트는 불확실한 존재인 신을 증명하기 위한 토대로서, 이성의 명증성을 증명하고자 이 명제를 이용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대였다. 그에게 신은 존재를 증명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증명시켜 주는 존재였다. 즉, 신을 생각할 수 있는 내가 있기에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성(reason)'을 통해 '나(myself)'의 명증성을 증명했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The one)'을 통해 나의 명증성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목적은 달랐지만 결국 자신의 명증성을 확보했다는 결과를 야기했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들이 주체개념의 창시자이자 시점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주체개념 형성에 그들의 기여도가 상당함은 부정할 수 없다.
역사적 선험성 혹은 역사적 아프리오리(a priori)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말이다. 따뜻한 얼음, 세모난 사각형과 같이 선험성과 역사성은 서로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진다. 역사라 함은 경험이 쌓이는 귀납적인 성질을 띄고, 선험성이라 함은 경험과 상관없는 연역적인 성질을 가진다. 그러니까 역사적 선험성은 '경험적인 경험 이전의 것'이라는 말이 된다. 차가운 핫초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이 단어는 언뜻 보면 그냥 개소리 같지만, 이 세상을 꿰뚫는 냉철하고 논리적인 개념이다.
규범과 문화란 태초부터 그 자체로 있던 것이 아니며, 시간이 흐르며 형성된 것이다. 가령 한국의 효(孝)와 서구의 기독교도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세상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절대적인 상수가 아니라 사회적 결과물이다. 이 두 가지는 지도와 달력을 갖는 존재다. 그러나 우린 그런 것들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지 못하고,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보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 그래서 이것들―역사적 아프리오리한 것들―은 나―개인―에게 선험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인류―사회 혹은 구조―에게는 경험적이다. 따라서 나는 그저 받아들이지만, 사회는 그것을 예전부터 형성해 온 것이다.
역사의 선험성과 선형적 서사는 우리 자신을 형성해 왔으며, 그것들은 사회, 문화, 관습, 법, 권력, 지식 등 수많은 양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그것을 수용하는 개인에게 '주체'라는 교집합이 생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걸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생각한다. 또한 “인간은 언어를 자기 뜻대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로 인간이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자유롭게 언어로 표현하는 것일까? 오히려 언어에 의해 생각이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이규현, 43)?”
개인의 특성은 그가 갖는 본질이 아니라 ‘구조 전체 배열이 만들어 내는’ 하나의 효과, 결과이다. 다른 구조, 다른 체계, 다른 배열은 다른 의미, 다른 특성, 다른 개체를 만들어 낸다. 각 개인, 곧 주체는 그가 속하고 있으며 그를 만들어 낸 구조가 발생시킨 효과이자 결과이다. 한마디로 주체는 구조의 효과이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차이들의 체계 혹은 구조가 개별자의 특성을 발생시킨다(허경, 19-20).
결국 주체라는 자명한 출발점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구조의 의한 효과라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존재하는 데 있어서 사회와 세계라는 지평이 있어야 하듯이, 주체라 불라는 그것도 구조라는 지평 위에 존재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세계라는 지평과 구조 위에서 우린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것을 익히고, 받아들이며, 그것으로 소통한다. 결국 주체라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던 절대적 요소도 언어에 의해 생겨난 결과물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주체라는 것은 영원히 그 값이 일정한 상수는 아닐 것이다. 지평이 변하면 그 영향을 받고 같이 변화하는 변수일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박정태 역, 이학사, 2022.
허경,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읽기』, 세창미디어, 2021.
이규현,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지식의 풍경과 언어의 검은 태양』, 살림,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