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iddegeral review
결국 다시 갔다 왔다. 루이비통 에스파스. 이번에는 도슨트의 설명과 함께 감상했으며, 나뿐만 아니라 다른 관람객들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도슨트 분이 해설을 해주셨는데, 사실 작품에 대한 설명보단 셰일라 힉스(Sheila Hicks, 1934~)라는 작가에 대한 설명이 도슨트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해설을 하는 입장에서도 작품에 대해서 할 말이 그렇게 없었나 싶었다... 무튼 나는 설명과 함께 세 작품을 다시 감상했다. 힉스라는 사람의 전기와 작품 경력 그리고 그녀의 예술에 대한 주관을 도슨트분이 잘 이야기해 주셔서 저 작품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이해 아니, 익숙해질 수 있었다.
이번 힉스전을 보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작품들의 형태다. 보통 미술 전시회를 가면 우리는 하나의 물체인 작품을 감상한다. 프레임 안에 있는 회화, 서있는 조각상 등 작품은 보통 한 덩어리이다. 아무리 현대예술이 해체를 지향한다고 해도, 내가 지금까지 봤던 작품들은 거의 하나의 덩어리였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본 작품들은 그렇지 않았다. 프레임이라는 틀에 갇혀있지 않으며, 자유분방하게 그 연장성을 영위하고 있었다. 저 작품들이 서로 다른 물질성을 띄지만 그렇다고 접착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붙어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작품을 수장고에서 가져와서 조립을 했다는 말인데, 여기서 내가 말한 조립이라는 과정이 내게는 이 작품의 의미이자 본질로 느껴졌다. 위의 사진의 왼쪽 끝에 있는 저 산더미 같은 작품이 만약에 그 집합으로써가 아니라 각각 하나로써 접할 때도 과연 그것은 작품인가? 아니면 작품의 부품 혹은 재료일까? 저 작품은 실더미들이 모여있는 것에 의의를 둔 것일까, 아니면 텍스타일이라는 재료에 의의를 둔 것일까?
도슨트가 종료되고, 직원에게 따로 찾아가서 물어봤다. 저 설치미술 작품들의 배치와 구성은 작가의 의도가 담긴 것이냐고. 그랬더니 놀랍게도 담겨있다고 한다. 힉스가 외국에서 직접 청담동 루이비통에 온건 아니고, 그의 조수가 파리에서 그곳에 직접 와서 힉스와 영상통화를 해서 힉스가 그 공간을 보고 직접 작품의 설치를 구상했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은 그냥 실더미들이 아니라 힉스의 배치물들인 것이다. 이 작품을 접한 게 두 번째인데, 처음에는 그냥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고, 배치도 그냥 막 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저 작품에서 작가의 정신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못 느꼈다. 하지만 도슨트의 위와 같은 설명을 듣고서는 저 작품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않지만, 힉스의 작품으로 느끼게 되었다. 다른 작품들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오늘 감상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셰일라 힉스의 세계를 접함으로써 작품이 대지 위에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열린 세계의 작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작가의 인생, 다른 작품들을 모르면 그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없다.
“근대의 문화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한 수집과 진열의 문화다. 여기서 작품은 원래 그것이 속하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다른 조각이나 신상들과 나란히 전시된다. 이로써 ‘세계’는 붕괴하고, 작품은 한갓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세계를 잃어버린 작품은 관광객의 눈요깃감에 지나지 않게 된다(진중권, 2003, 64).” 하이데거 미학의 시사성은 아마도 작품 그 자체 만을 관조할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세계와 예술가를 함께 관조함으로써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내러티브의 조각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의 결과로 우리는 선진국의 큰 박물관에서 타국의 유물들을 감상하는 그 경우에 우리는 그 물질이 가는 세계를 열어볼 수 없다.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그 작품은 그저 대지 위에 존재하는 물체일 뿐, 세계의 지평 위에 있는 작품이 아니다.
우리가 마치 한 사람의 단점이나 일부분을 보고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술작품도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 사건을 펼치지 못하고, 대지 위에서 침묵을 지킬 뿐이다. 바벨의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아담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 속에서 아담의 언어를 본다. 아담의 언어가 사물의 참모습을 보여주듯, 예술 작품은 존재자의 진리를 보여준다. 그에게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정립되는 데 있다. 예술 작품은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 표출되는 장이며, 이 장 속에서 존재의 진리가 일어난다(진중권, 2022, 106). 예술 작품은 세계를 건립하면서, 동시에 대지를 설립한다. 세계는 열려하고, 대지는 닫으려 한다. 진리는 이렇게 세계와 대지사이에 밝힘과 가림의 투쟁으로 존재한다. 작품은 바로 이 팽팽한 대립 속에 닻을 내리고 안식한다(114).
우리가 현대미술이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도 어쩌면 세계에서 그를 이해하려 하기보단 오직 대지 위에서만 그 작품세계의 파편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퍼즐 조각 하나만 보고서 우린 완성된 퍼즐의 이미지를 알 수 없다. 나는 오늘 힉스의 세계를 접함으로써 세 개의 작품에서 존재자의 진리를 발견했다. 물론 구라다. 어떻게 그 진리를 파악하겠는가. 하지만 작품이라는 파편이 아니라 힉스라는 사람 그리고 그의 예술적 서사를 들음으로써 왜 저런 작품이 나왔을지, 그리고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대강 느낄 수 있었다.
위의 작품의 원래 이름은 Blue letter가 아니라 Blue weave였다고 한다. 나는 저 작품으로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도슨트가 보여준 도판으로 접했다. 뭔가 딱 보자마자 말레비치의 "절대주의"가 느껴져서 도슨트에게 그의 영향 혹은 교류가 있었냐고 물었더니, 힉스는 그런 개념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에게 예술은 그저 joy였다고 한다. 아이처럼 즐기는 게 그녀에게 예술이라고 한다. 여기서 또 한 번 머리를 맞았다. 그래 예술은 즐거움이지, 그런데 왜 나는 그것을 완전히 즐기지 못하고, 마치 종교처럼 대할까.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_____, 『미학 오디세이2』, 휴머니스트,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