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moi et le moi
"인간은 모두 아프다." 심리학의 거장 중에 하나인 융이 한 말이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임상적인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이 아닌 심리적 고통 더 정확히는 실존적 고통이다. 우리는 사회라는 지평 위에 존재하는 현존재로써, 그 구성원의 역할을 맡게 되는데, 이때 한 인간의 자아(ego)가 형성된다. 언니, 오빠로서의 책임, 부모로서의 책임, 기업의 임직원 혹은 학생으로서의 책임 등 우리는 위치하는 곳에 따라 각각 다른 기대를 받으며, 책임을 떠맡고, 그 책임과 기대에 부응하려 고군분투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라는 것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형성된 나'를 의미한다. 카를 융이라는 심리학자가 말하는 자아라는 단어는 어쩌면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의심했던 주체(sujet) 일지도 모른다. 즉, 구조속에서 형성되는 나. 푸코와 같은 구조주의자들이 폭로하려 했던 주체가 융의 자아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자아는 구조에 의해서 형성되는 주체이며, 이것이 과연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자기(self)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앞에서 언급했던 푸코가 말년에 주체 대신에 형성하고자 했던 그 자기(moi)와 맥락상 일치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앞에서 언급한 자아라는 것은 철저히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자신이다. 회사에서의 자아, 가정에서의 자아, 연인으로써의 자아, 친구로서의 자아는 다 다를 것이다. 상황이라는 존재의 지평이 다른 이상 자아란 다르게 양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아라는 개념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변수(variable)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처럼 우린 각 게임마다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그것이 그 상황에 맞는 본질로 주어지게 된다. 내가 앞에서 자아와 상반된다고 했던 자기는 이와 반대로 상수(constant)적 양태로 존재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자기의 정의를 살펴봐야 한다.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을 이루는 정신체계의 중심'을 의미한다.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로이트는 의식의 그림자와도 같은 무의식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자아는 온전한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원자아, 자아, 초자아. 여기서 원자아는 원초적 본능을 추구하는 정제되지 않은 원시적인 의식상태다. 무조건적으로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초자아는 앞에서 언급한 자아(ego)와 같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를 지키는 것을 추구하며, 흔히 말하는 선한 행동을 유도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는 그 가운데서 선택의 기로에 빠진다. 자아(or 초자아)는 상황에 따라 다른 양태로 존재하며 발현된다. 하지만 원자아는 그저 부족한 것을 충족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이 성욕이던 식욕이던 수면욕이던 그것은 원초적 본능을 추구한다.
내가 앞에서 자아를 사회적인 것인 동시에 변수적인 요소라고 했고, 자기를 정신 체계의 중심이자 상수적인 요소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 뒤에서 나는 자아가 자기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어떻게 변수가 상수에 속한다고 말하는 걸까?
자아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처신해야 하는 방도가 다르기 때문에, 변하는 변수이며, 자기라는 것은 나 자신의 개체성을 보증하는 고유한 숫자여야 하기 때문에 상수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와 자기 둘 다 나 자신이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언듯 보기에 비슷 무리하며, 이음동의어 같지만 위계가 있다. 자아란 자기의 양태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양태는 자기라는 본질에서 우러러 나온 결과물이다. 마치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해결책을 제시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