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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ug 15. 2024

존재와 이름

이름에 대하여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 <Strip>(2013)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판단을 하는 것이다. 세잔의 회화 속에서 사과를 발견하던가, 고흐의 작품에서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는 것처럼 구체적인 개별자에서 보편적인 개념이나 원칙을 발견하는 판단을 칸트 철학에서는 규정적 판단이라 한다. 회화 속의 붉은 과실, 스크린 속의 빨갛고 둥근 것, 백설공주가 먹고 깊은 잠에 빠진 이유. 이 모든 예시는 사과라는 보편적 개념을 지시한다. 여기서 사과라는 명사는 보통명사에 속한다. 그것은 개별적인 혹은 유일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개념이며, 하나만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담지한다. 반면에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는 대상을 보편자의 바깥에 놓이게 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만든다. 같은 사과라도 이름이 붙으면 그것은 다른 사과들과 다른 존재로 판단되며, 그의 이름은 그 개체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드러낸다. 

  나는 이 글에서 이름이 갖는 존재론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저 한 순간 발화되는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름은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를 나타내며, 익명성과 동일성 밖으로 내놓는 중요한 지표이다. 때론 국민 혹은 시민이라는 익명의 일반명사에 속하고, 개인의 이름 혹은 개별적인 지표나 호칭 등으로 우린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서 즉, 단일한 개체로서 존재를 드러낸다. 이처럼 이름이란 개별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엠블럼과도 같으며, 현존재는 때로는 그 이름을 지움으로써 익명의 그늘 속으로 숨는다.


사물과 고유명사

  사물의 이름을 알아보기 전에, 사물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 이론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사물은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사물, 제품, 예술작품. 우선 사물은 어떤 목적이 없다는 점에서 자기-충족적이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다. 제품은 어떤 목적에 따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따라서 유용성을 갖고 있으며, 작품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 자기-충족성을 갖고 있다(SV, 125-7)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사물이 그에게 의미 있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보통 사물은 인간에게 도구적 존재로 인식된다. 그것은 인식론적으로 투명한 존재다. 하지만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그냥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라는 현존재의 지평에서 시선이 통과하는 투명한 도구가 아닌 시선이 뚫지 못하는 불투명한 사물 즉,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사물일 것이다.

  사물, 제품, 예술작품 중에서 이름을 갖는 사물은 대게 예술작품의 경우일 것이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입 주변을 닦는 냅킨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자동차에 붕붕이라는 애칭을 붙이고, 애지중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에게 붕붕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동차는 그 이름과 상관없이 자동차라는 이동 수단으로써의 도구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때론 사물이 고유명사를 가지게 되어서, 더 이상 그 사물이 아니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1960~) - <코미디언>(2019)

  일반명사에 속하는 바나나. 그것은 그냥 바나나로 불린 땐 그냥 음식이거나 식재료이다. '바나나'라는 보통명사는 그 개체의 고유성을 제거한다. 바나나의 검은 점이 다른 바나나들과 조금 다르고, 특이해도 그것은 그저 바나나이다. 하지만 예술가가 그것을 선택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다른 사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코미디언>이 다른 바나나들과 달리 예술 작품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예술계가 <바나나>에만 특별히 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실 세상에 있는 어떤 물건도 예술계가 거기에 자격을 부여하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예술계가 자격을 부여하자 바나나까지도 예술이 되었다(AO, 194). 

  카텔란이 바나나를 <코미디언>이라는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바나나를 덕트테이프로 붙이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테이프만 붙였다면 그것은 카텔란의 행위 예술 혹은 그저 음식에 장난치는 해프닝에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카텔란은 '코미디언'이라는 이름을 바나나에 부여함으로써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바나나라는 일반명사에 가려진 그 개체의 고유성을 복권시켰다.

  고대의 예술가들은 어쩌면 현대의 예술가들보다 더 뛰어난 테크네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많은 작품을 미디어를 통해서 쉽게 접근하고, 작품이라는 것에 직접 다가가는 것이 너무나도 쉽지만, 과거는 그렇지 않았다. 또한 작품을 만드는 환경과 재료 또한 그들이 훨씬 열악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어찌 된 게 우린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지나가던 하나의 작품으로서만 눈에 담았으며, 그 작품의 이름과 작가의 정보도 모른다. 

  그 이유는 예술작품이 작가의 부산물이 아니라 종교와 정치라는 세속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미술은 아름다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미술의 주요 목적은 신자들에게 신의 은총과 권능을 증명해 주는 예 중의 하나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HW, 129).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술을 감상할 때 전시품으로서 그것을 감상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시가치를 위한 작품이 아니라 제의가치를 위한 도구였다. 따라서 이 미술품들은 관람자에게 작가의 예술성보다 신앙심을 상기시키는 종교적 수단이었다. 

  구체적 예시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무도 그가 배운 것과 다르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그에게 ‘독창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과거에 추앙을 받았던 기념비들과 가장 비슷한 조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미술가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3천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기간 중에 이집트의 미술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피라미드 시대에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여겨졌던 것들은 천 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훌륭한 것으로 생각되었다(65-7).

  예술이 정형화되고, 종교와 세속의 그늘에 있던 과거에 작품의 개성은 없었으며, 따라서 작품을 분류할 필요도 없었다. 작품은 그저 성경과 같이 말씀을 상기시키는 수단에 불과했으며,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의 이름을 위한 곳은 없었다. 그러나 예술이 기술의 시녀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았을 때, 예술가개성은 작품의 꽃이 되었고, 그것은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인 이름을 부여받고, 고유한 개체가 된다.

  고유명사인 이름이 사물에 부여된다는 것은 그 개체가 사과라는 보편적 개념의 바깥에 놓이게 만들며, 그 고유성을 복권시켜 개별자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이 생기는 순간 그 사과는 다른 사과들과 다른 존재론적 지위를 점하게 되고, 일반 사과가 아니게 된다. 그 사과는 이름을 붙인 현존재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인간과 일반명사

  앞에서 사물에게 이름을 부여하면서 그 사물이 동일성에서 벗어나 고유성을 복권한다는 담론을 펼쳤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반대다. 인간의 경우, 모든 사람이 이름을 가지며, 고유한 존재이지만, 일반명사로 명명됨에 따라 그 존재는 익명성 속에 빠져버린다. 이름이 아닌 지위나 신분으로 불리며, 통계로 인식되는 현시대 사회인에게 고유명사인 본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는 줄어들고 있다. 그저 부여받은 13자리 주민번호로 정부와 지자체에 인식되고, 나이, 소속, 거주지, 학력 등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며, 그 고유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면서 그 사물의 고유성을 복권시키는 것과 반대로 인간의 이름을 지우는 게 인간이라는 게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이름은 지워지고, 일반명사만 남았는가? 그것은 내치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내치는 개입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을 배려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이와 같은 형태로, 인간의 생명과 그 상호 관계성에 대한 개입을 통해 내치가 목표로 하는 것은 국가의 힘의 증대이다. 이를 위해 정치는 이 말의 넓은 의미에서 인간들끼리의 ‘의사소통’을 보증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국면에서, 또한 복수의 단계에서 사람들을 행복으로 안내하는 것이, 요컨대 사람들이 그저 “살아남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보다 잘 살아가는” 것을 돕는 것이 내치의 역할이 된 것이다(AF, 106-8). 이런 개인들의 생명에 대한 배려가 최종적으로는 국가의 힘의 증대를 목적으로 했다. 내치가 일어난다는 것은 권력이 개인들의 신체, 몸짓, 태도, 일상 행동에 침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권력의 ‘육체화(incorporation)’이다. 거기서 권력은 주체에 의한 재현이라는 중계를 거치지 않고, 신체의 두께 자체 속으로 물질적으로 침투하게 된다. 의식으로의 내면화를 거치지 않고 신체로 침투하는 권력, 그것을 가리켜 푸코는 ‘생명권력(bio-pouvoir)’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10).

  푸코는 내치의 기원을 기독교의 사목권력이라 본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상황에서 인간을 인도하고, 더욱이 내세에서의 혼의 구원을 위해 현세에서의 행동을 규제하는 권력을 말한다. “또한 그것은 집단 전체에 행사되는 권력이면서도, 그 집단의 개인들, 이른바 무리의 양 한 마리에 책임을 가짐으로써 전체 집단의 구제를 배려하는 권력이기도 하다(100).”

  기독교에서의 사목권력은 양심의 검사—점검—와 지도라는 두 개의 도구와 묶일 것이다. 여기서 양심의 검사란 지도자에게 혼의 심층을 노출시키는 것을, 또 양심의 지도란 지도자와의 항상적인 연대를 각각 의미한다. 기독교의 사목권력은 이 두 개의 실천이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양심의 검사나 지도, 종속 같은 기독교의 기술은 모두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진 것이다. 그것은 현세에서의 자기의 ‘억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억제(morrification)’란 그 프랑스어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현세와 거기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체념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상에서의 죽음”으로서의 자기의 포기이며, 일종의 예속화이다. 이처럼 개인들의 개별적인 삶에 대해 항상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목권력은, 기독교에서 목자와 무리 사이의 개별화된 복종관계를 확립하고, 더 미시적이고 지배적인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됐다. 이리하여 푸코는 사목권력을 생명정치에서의 권력, 즉 우리의 삶에 대해 즉각적으로 행사되고, 그것을 종속화하려고 하는 미시적 권력의 원형으로서 정립하게 된다(101-2).

  통치란 권력을 쥔 소수가 다수의 인민을 관리, 통제 혹은 지배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이때 소수는 다수라는 대상을 모두 일일이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배치, 분류, 식별과 같은 정리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개개인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보편적 정보만이 남게 된다. 이때 고유한 개체인 인간의 고유성과 실존은 보편이라는 칼날에 잘려나가며,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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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나는 이름에 대해 다루었다. 나는 사물을 세 가지로 나누었으며, 명사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사물의 경우는 사물, 제품, 예술작품이었으며, 명사의 경우, 고유명사와 일반명사였다. 첫 번째 절에서는 사물의 경우를 예시로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를 통해서 개별성과 그 존재의 고유성이 정립됨을 알아봤으며, 두 번째 절에서는 통치를 통해서 개인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 불리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두 번째 절의 경우는 글을 쓰기 전 기획과는 다르게 흘러갔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이름이라는 명사가 인식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바나나는 그저 식품이거나 식재료다. 그래서 그것은 인식되지 않는 투명한 사물이다. 그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러나 바나나라는 일반명사가 아닌 코미디언이라는 고유명사가 붙게 되면, 그것은 투명한 도구가 아니라 불투명한 시선의 종착점이 된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출석번호로 불릴 때 학생은 그저 수많은 급우 중에 한 명이지만, 그의 이름으로 불릴 때 그는 개인이자 그 존재자체로서 인식된다. 

  윌리엄 터너가 안개를 화폭에 그림으로서 영국인들은 안개를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례는 미술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는 말을 할 때 많이 인용된다. 그림이라는 것은 일상 속에서 투명하게 인식하던 도구존재를 시선의 종착점으로 만드는데,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는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하게 만들고, 그 고유성을 보장하는 엠블럼으로, 그를 세계에 개별자로서 드러낸다.


Reference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 이종숭 역, 예경, 2019. (HW)

다케다 히로나리, 『푸코의 미학』, 김상운 역, 현실문화, 2018. (AF)

박정자, 『빈센트의 구두』, 에크리, 2005. (SV)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2』, 휴머니스트, 2022. (A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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