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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Sep 10. 2024

한국인에게 욕설이란

욕설의 두 얼굴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 <Double Self Portrait >(1914)

  한국어에서 욕은 정말 다채롭다. 다른 언어의 욕설이 흑백영화라면 한국어 욕설은 마치 칸딘스키의 회화와도 같이 화려하다. 어떻게 그런 다채로운 욕설이 가능한지 한국인인 나도 신기하다. 사람들은 욕설을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생각한다. 부정적 감정을 배설할 때 쓰는 도구이거나 자신의 상스러움 혹은 천박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인지한다. 물론 앞의 두 가지 측면 모두 타당하다. 그래서 우린 공적인 자리에서 욕설을 삼가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 우린 욕설을 한다. 욕설의 부정적 측면 혹은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아서 욕설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냥 좋지 않음을 알면서 우린 왜 욕을 할까? 그리고 욕설이란 과연 어떻게 사용해야 올바를까? 이것이 오늘의 주제다. 욕설의 두 얼굴을 살펴보고, 욕설의 기능을 알아보고, 그렇다면 욕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찰해보자 한다.


부정적 측면

  공인들은 카메라 앞에서 육성으로 욕을 하지 않으며, 소셜 미디어에 게시글을 올릴 때에도 욕설을 배제하고 신중을 다해 글을 쓴다. 혹시라도 실수로 욕설을 하게 될 경우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사회에 욕설을 삼가하는 불문율이 있음을 당연히 알 수 있다. 대통령은 대국민담화에서 "물가가 존나 높아서 지지율 좆됐다...장관새끼 뺨아리 딱대라..."라고 하지 않는다. 이유를 파고들지 않아도 한 국가의 수장이 저런 식으로 상스럽게 도어스테핑을 한다면 그건 세계적인 뉴스감이다.

  수많은 어휘 중에서 욕설을 고른다는 건 그 사람의 지적인 수준이 딱 그 정도라는 것을 암시한다. 불가능하다는 상황을 표현하더라도 "번거롭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굉장히 정중하고, 신뢰를 줄 것이다. 그러나 "아 존나 귀찮아요 쌉불가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와 정반대의 인상을 줄 것이다. 수많은 언어의 패 중에서 굳이 가장 천박한 카드를 내민다는 것은 본인이 얼마나 비굴하게 매달리는지 혹은 본인의 심성이 얼마나 바닥인지를 드러내는 좋은 방법이다.

  그 천박한 발화는 본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그 발화는 나의 입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뻗어나가 다른 사람들의 고막을 자극한다. 얼마나 본인이 천박하고, 경솔한지 인식하는 사람은 나와 대화라는 투쟁을 벌이는 내 앞의 상대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있는 모두가 될 것이다.

  정리하자면, 수많은 어휘 중에서 굳이 욕설을 선택한다는 것은 지적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거나 사회성이 떨어짐을 스스로 증명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설을 자제하며, 공적인 자리에서는 욕설을 완전히 삼가한다.

  혹은 강한 말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전문용어로 쎈질(?) 하기 위해서—욕설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저렴한 어휘에 위압감을 느끼는 건 어린아이와 같이 욕이 익숙하지 않은 존재 말곤 없지 않을까?


긍정적 측면?

  욕설의 긍정적인 측면? 굉장히 모순적인 개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욕설에도 나름의 긍정적 기능이 있다고 본다. 보통 욕설은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 그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 많이 쓰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우린 욕을 한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 혹은 평소에도 만나는 절친을 만나는 우린 기분 좋은 상황에서도 욕설을 들을 수 있다. 아니면 친구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관계에서도 우린 그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때, 욕은 인신공격과 격양된 감정을 배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들만의 엠블럼이다. 그들은 욕이라는 서로의 엠블럼을 꺼내어 상대에게 서로 보여주며 자신이 상대의 동일자임을 증명해 낸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쓰이는 욕설은 평소와는 다른 의미와 수단으로 사용된다. 분명히 평소에 모욕적이고, 인신공격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누가 들어도 욕설인 표현이 동일자의 엠블럼으로서 작동할 때는 그 모욕적인 함의는 모두 걸러지고, 오직 그 친근한 감정 혹은 우정만이 상대에게 전해진다. 즉, 욕설을 사용함으로써 서로가 이 정도로 가깝고, 친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혼자 친하다고 착각하고 있던 상대에게 그러한 동일자의 엠블럼을 보여주는 행위도 있을 수 있다. 그 경우에 그 엠블럼은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여 상대에게 친목의 수단보다는 인신공격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욕설을 동일자의 엠블럼으로—친분의 상징으로써—사용하는 것은 서로 간의 두터운 우정이 전제되어야 하며, 상대도 내가 그를 생각하는 것만큼 친하다고 여긴다는 것이 확실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욕설의 기능

  욕설도 언어이기에 결국 표현 수단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것은 어느 곳에나 넣을 수 있는 말이며, 긍정의 의미와 부정의 의미를 둘 다 가질 수 있으며, 강조를 위한 부사로써도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린 무엇보다도 욕설을 감정표현 수단으로써 주로 사용한다. 앞에서 언급한 강조와 의미표현 역시 한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우린 '씨발'과 '존나' 발화한다. 로또에 당첨된 엄청난 기분을 기분이 좋다라는 표현으로는 도무지 담을 수 없을 때, 혹은 상대방이 나에게 너무나도 큰 잘못을 해서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가 알고 있는 어휘 중에 알맞은 것이 없을 때 시발이라고 외친다. 혹은 너무 맛있어서 '맛있다'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미각을 느낄 때에도 그 부족한 표현인 '맛있다'에 '존나'를 붙인다. 욕설은 어느 역치 이상의 감정—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을 나타내는데 주로 쓰인다. 그래서 멀끔해 보이는 사람들도 감정이 격앙되면 욕설을 하는 것이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감정이 어느 선 이상을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욕설을 해야 잘 쓴다고 소문이 날까? 사실 최고의 방법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나 원초적이고, 저급한 단어를 굳이 사용해야 할까? 그것을 사용하는 상황을 줄이는 것은 개인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정도에 한계가 있지만, 어느 상황이든 우린 그 단어를 피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사용하는 장비는 나를 대신해주지 않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내가 발화한 언어는 나의 연장이다. 그래서 어느 상황에서든 욕설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지만 욕설은 그 감정표현 수단뿐만 아니라 동일자의 증표와도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동일자들 사이에서 욕을 하지 않는 다면 나는 그들과 섞일 수 없는가? 내가 살아보니 그건 아니더라. 무리 내에 그런 친구가 있을 경우에, 다른 친구들이 그에게 욕을 강권하지는 않는다. 그냥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그래서 욕설의 긍정적인 면을 우리가 이미 봤지만 굳이 그 사용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욕설의 빈번한 사용의 가장 큰 단점은 따로 있다. 그것은 표현의 궁극기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맨날 욕하는 사람이 욕을 하면 '아 저 새끼 또 욕하나 보다'하고 그냥 넘어간다. 그건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분이 좋든 좋지 않든 아무렇지 않든 항상 욕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에게 일상어일 뿐이다. 하지만 평소에 욕설을 하지 않는 사람이 욕설을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가 조용하게 욕설을 하면 주변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그리고 주위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본다. 평소에 욕설을 전혀 하지 않는 그가 욕을 했기 때문이다. 

  위의 상황은 마치 양치기 소년과 같다. 양치기 소년이 맨날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된 것처럼, 맨날 욕을 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분노를 너무 자주 표출하여 그것이 정작 진실하고 발휘되어야 하는 순간에 그러지 못하게 한다. 

  결국 욕설이란 일정 감정 이상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한 언어적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린 그 필살기와 같은 도구를 너무 자주 사용함으로써 더 큰 역치의 자극을 원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도파민 사회의 시작점이자 그것과 상호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욕설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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