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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Dec 01. 2021

능동적 죽음은 불가능하다.

자살담론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죽음(1991)”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이미 세계 속으로 이미 던져져 있다는 의미의 ‘피투성(thrownness)’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피투성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는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 했다.

 

 죽음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의도한 죽음’이나 ‘의도하지 않은 죽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의도한 죽음’의 한 부분인 자살에 대해 다뤄보려고 한다.


 사람들은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도 칭한다. 그 선택 후에는 되돌릴 수 없기에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는 것 같다. 또한 극단적 선택의 선택이라는 단어는 자살이 능동적인 행위라는 것을 내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자살은 능동적인 행위일까? 보통 자살을 하는 이유는 부정적인 요인들이 많을 것이다. 더 이상 살 이유를 못느끼거나 엄청난 빚을 갚을 능력이 없거나 세상의 모든 것이 질리기 때문이라던가 아주 많은 부정적인 이유들이 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요인도 있을까?


 너무 행복해서 지금 이 순간을 인생의 마지막 장면으로 하고 싶어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고실험을 해보자. 그 사람은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고실험이니 그렇다치자.) 부정적인 요인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처럼 이 사람의 ‘그 선택’도 능동적인 것일까.


 나는 자살이 능동적인 죽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목숨을 끊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고 본인의 과실로 계기가 생길 지라도 나는 당신이 죽음의 원인을 본인(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자살이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이 당신을 죽이는 것’이라 여긴다. 당신은 앞에서 말한 피투성처럼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선택을 하게 된 경향성은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적인 감정이다. 그러니 자살하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이다. 극단적 선택을 한다면 세상에 항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능동적인 죽음은 불가능하다. 고로 완벽한 자살은 없다. 세상이 당신 스스로 당신에게 방아쇠를  당기게 했기 때문이다.


 *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로 생각할 때, 인간이 세계에 던져졌다는 말을 신에게 버림 받았다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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