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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Dec 01. 2021

현대사회의 판옵티콘과 자기검열

누군가 당신을 보고 있다.

당신은 24시간 동안 감시당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른다. ‘감시를 당한다’는 말이 수동적으로 남에게 보여지는 상황을 생각하게 하겠지만 ‘여기’에서 당신은 능동적으로 자신을 감시대상으로 만든다.


우리는 SNS라는 디지털 ‘판옵티콘’에 스스로 들어간다. 우리 모두는 수감자이며 동시에 감시자이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엔 소식을 전하거나 안부를 물으려면 직접만나는 방법(오프라인)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스마트폰, 태블릿PC, 컴퓨터와 같은 기기들이 없었고, 통신망 또한 갖춰지지 않았다. 그래서 파발을 보내거나, 봉화를 통해 정보를 전달했고, 그것들은 지금의 매체들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느렸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인프라가 갖춰진 지금은  정보가 넘쳐나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우리의 생활수준은 아주 높아졌다. 무엇을 배우려면 유튜브나 포털사이트를 통해서,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배울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에게 안부를 물어보는 것 또한 굉장히 쉬워졌다.  그리고 SNS(Social Network Serive)의 출현으로 누군가의 일상도 공유가 가능해졌다.


나는 15살에 스마트폰을 접하면서 SNS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엔 ‘카카오스토리라는 SNS 유행하여 모두가 그것을 했다. 처음에는 글을 쓰고 친구들과 댓글을 달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들을 SNS 다시 연락하게 되어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여과없이 내가 올리고 싶은 게시물을 올렸던  같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는 나온지 조금  ‘페이스북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은 게시물도 올리고, 여러 페이지를 통해 영상을 보거나 정보를 공유할  있는 기능이 있어서  당시에 페이스북으로 시간낭비를  했다. 그리고 ‘좋아요라는 개념이 카카오스토리의 느낌과는 달리  직관적이라 인상이 깊었고, 페이스북만의 ‘태그기능으로 친구들과 서로 게시물에 태그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내가 좋아요를 누르거나 태그하면(혹은 태그 당하면) 나와 친구관계인 사용자들이  게시물을    있었다.


 2021년엔 ‘인스타그램(Instagram)’이 대세 SNS인 것 같다. 인스타그램은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과는 다르게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게시물을 올릴 수 없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포함해야만 포스팅 할 수 있다. 그리고 팔로워들이 24시간 동안만 볼 수 있는 ‘스토리’라는 기능도 인스타그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인스타그램은 다른 SNS보다 가시적(visible)인 성격을 가졌다. 이러한 인스타그램의 유행으로 카메라와 필터 어플도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을 만큼 트렌디하다는 뜻의 ‘인스타 갬성’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미셸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과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 설계도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의 저서인 ‘감시와 처벌’의 제3부 규율의 ‘판옵티콘 권력’ 부분을 읽다가 SNS가 현대사회의 '판옵티콘'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옵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이 합성된 용어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제안한 교도소의 형태이다. 교도소에서 중심에 위치한 감시자들은 외곽에 위치한 피감시자들을 감시할 수 있으나, 감시자들이 위치한 중심은 어둡게 되어 있어 피감시자들은 감시자들을 감시자들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게 설계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이렇게 되면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죄수들이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페이스북이 감시자의 위치에 있는 판옵티콘

나는 왜 SNS가 현대사회의  판옵티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내가 찾은 SNS와 판옵티콘의 공통점은 누가 나를 보는 것을 안다는 점과 지금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보는 것을 의식하고, 자기 검열(Self-censorship)후에  포스팅을 한다. (비공개 계정일 경우엔 내가 허락한 사람만 내 컨텐츠를 보겠지만 비공개 계정이 아닌 경우는 누구나 볼 수 있기 때문에, 공개 계정이라는 전제로) 그래서 SNS에는 자신의 단점과 같은 부정적인 내용의 글은 잘 올라오지 않는다. 보통 '내가 이렇게 잘 산다'는 식의 글만 올라올 뿐이다. 정말로 그런 모습이라 여과 없는 모습을 보여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SNS에 올리기 위해 과장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미디어와 매체가 고도로 발전한 현대사회에서 SNS 포스팅은 경제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고 사회적 파급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셀럽(유명인을 뜻하는 '셀러브리티(Celebrity)'의 줄임말로, 누구나 따라하고 싶을 정도로 유행을 이끄는 유명인사를 지칭)들은 대가를 받고 제품의 리뷰나 광고의 성질을 가지는 게시물을 포스팅하기도 한다. 그러한 광고성 게시물은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행은 나중에 회고될 시대적 트렌드가 될 수 있으며, Fad(일시적 유행)로 끝날 수도 있다. 유행이라는 것은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유대감을 조성한다는 장점이 있고, 부정적인 관점으로 유행을 보면 유행을 따르지 않는자들이 타자화 될 수 있다는 점과 그 유행이 대중을 선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고려하여 SNS를 바라보면 소수의 셀럽이 대중을 선동하고, 대중은 유행을 좇으려 더욱 SNS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남들에게 '인싸'로 규정되기 위해 SNS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지금 유행하는 무언가는 유행할 가치가 있을까? 모두가 하기에 나도 따르는 것이 아닐까? 불특정다수의 담론권력에 의해 끌려다니는 것은 아닐까? 사회 소수의 셀럽은 유행을 창조함으로써 대중을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유행을 좇아 남들에게 규정되려고 애쓰지 말고 나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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