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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Dec 01. 2021

제 4 혁명 : 파토스(Pathos)의 해방

잃어버린 온기를 찾아서

우리는 언제부턴가 진지한 말들보단 가벼운 말들로 진심을 희석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 그 계기는 무엇일까? 나는 ‘오글거린다’,’진지충’과 같은 말들의 탄생이 우리 사회의 감성을 억눌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의 ‘꽃보다 남자(2009)’와 같은 드라마를 지금 다시 보면, 어떻게 저렇게 오글거리는 것을 봤냐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 당시엔 재밌게 봐놓고 지금 오글거리다는 것을 보면, 우리의 감성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희석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물질을 통해 얻는 행복이나 사회적 위치를 통해 얻는 만족감으로 살아가는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물질 자체가 동기가 되어 우리가 스스로를 발전시키게 하고, 성취 후의 쾌락을 기대하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이 주는 쾌락은 유한하고, 만족을 하면 할 수록 더 큰 역치의 쾌락을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솔직한 감성으로 인간의 잃어버린 파토스(Pathos)를 찾아서 물질에 의존한 쾌락을 추구 하는 것보단 본인에게서 스스로 쾌락을 찾는 인간이 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2011)’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1976~)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에게는 3개의 혁명이 크게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융성하게 되었는지 이 책은 말해준다. 이 책 끝에서 그는 최근 들어 발달하기 시작한 생명공학과 공장식 가축 생산의 생명윤리문제와 그 위험성에 관하여 경고하며, 앞으로의 사피엔스가 지구상의 생태계에서 더욱 막대한 힘을 쥘 것임을 예견한다.


 나는 이 책을 보고 우리에게 닥쳐질 다음혁명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현재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인간은 그 기술을 이용해서 편리한 삶을 산다. 하지만 우리는 기술이 발전할 수록 사회의 감성은 점점 약해진다. ‘결정적 순간’을 기계와 함께 지낸 지금의 아이들이 과연 성인이 되었을때, 어떻게 될까?


  요즘 아이들이 지나치게 유튜브와 같은 매체에 의존하는 것을 보면 나는 저게 아이들에게 좋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육아법은 바뀔 수 있고, 내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당위성은 없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스마트폰만 보는 아이들을 보면 미래가 낙관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과연 그 아이들은 낭만과 감성을 알까? (나는 꼰대가 맞다.) 가면을 쓴 채 태어난 냉정한 깡통이 되지는 않을까?


  내가 어릴땐 스마트폰의 등장 이전이라 약속이나 식사중에 휴대폰을 보는 일이 적었다. 하지만 요즘 사회 구성원들의 약속에선 오랜만에 본 친구를 만나도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다. SNS와 같은 소셜미디어 혹은 통신의 발달로 평소에 자주 연락을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모두가 그럴까?


 그리고 꼰대적 관점으로 요즘에 나를 놀라게 한 모습이 있었다. 가족끼리 외식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테이블을 식당에서 봤다. 엄마. 아빠 , 누나 , 남자 아이 이렇게 온 것 처럼 보였는데, 남자 아이는 가족끼리 다 같이 밥먹는 식탁임에도, 혼밥하는 것처럼 이어폰을 양쪽귀에 끼고, 한 손엔 스마트폰을 들고, 한 손엔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그랬으면 난 엄마한테 등짝을 맞았을텐데, 그 가족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이 변한 것일까? 아님 내가 너무 보수적인 것 일까?


한 여성이 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사회인 지금 우리는 감염을 막기위해 비대면을 강조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비대면이라는 단어를 팬데믹 선언이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비대면은 그 전부터 존재했다.


 팬데믹 이전보다 훨씬 과거에 우리는 주문을 하거나 물건을 살때, 직원에게 ‘대면’으로 주문을 하고, 돈을 직원에게 직접 지불했다. 심지어 과거에는 ‘버스안내양’이라는 직업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위의 사진처럼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고 주문할때 받은 번호로 음식을 알아서 찾아간다. 최소의 비용으로 큰 수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같은 변화는 당연하다. 점주들은 매달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대신에 기계를 구매하는 한번의 지출로 매장을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손님 입장에서도 좋을까?


 단점을 말하기에 앞써, 키오스크의 장점은 있다. 주문을 하기 부끄러운 사람은 기계를 통해 주문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고, 이어폰을 중간에 빼지 않아도 주문을 할 수 있고, 키오스크에서 메뉴를 보고 직접 누르기에 주문 또한 정확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인간을 접촉할 기회가 더더욱 줄어든다는 점이다.


 나는 키오스크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기술이 발전할 수록 개인이 타인을 대면 할 일이 줄어든 다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책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만 지구에 살아남아 번성하게 된 계기가 인지혁명이라고 한다. 인지혁명으로 사피엔스는 기존보다 더 큰 규모의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게 되고, 부족정신, 국가, 민족, 인권, 원시 신앙 등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까지 생겨서 대단히 많은 낯선 사람들끼리도 공감과 협력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사회는 공감과 협력을 하는가? 현대사회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사람들은 자신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기 싫어한다. 밥을 먹을때도 이어폰을 끼는데 어떻게 소통과 협력 그리고 공감이 가능하겠는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 사회라 한계는 있지만, 우리는 충분히 공감과 협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글거리는 사람이나 진지충이 되기 싫어서 타인을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지 못해서 협력이 불가능한 상황이 아닐까?


 그렇다고 감성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감성 뿐만 아니라 논리도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파토스(Pathos)를 회복하면서 로고스(Logos)와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처럼 혹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 우리 내면에 공존하듯이 우리의 삶에서 파토스와 로고스는 균형있게 공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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