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Nov 24. 2024

아름다움

미학의 쟁점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 - <거울을 보는 비너스>(1647-51)

인간은 예술적인 존재이다. 여기서 예술적인 존재라 함은 그 존재가 예술을 하는 행위자이기도 하고, 예술을 보고 사유하는 관람자 혹은 관조자임을 뜻한다. 예술이란 그림을 그리는 작품활동일 수도 있고, 사물을 작품으로 고르는 선택의 순간일 수도 있고, 실존 자체를 영위하고, 자기를 배려하고 염려하는 것 또한 포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이 많은 행위를 한 번에 포용할 수 있을까? 현대에 와서 예술이란 미술, 무용, 음악과 같은 고상한 취미들을 일컫는 하나의 어휘로 인식되는 것처럼 보이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예술"이란 단어는 우리가 오늘날 "순수예술"이라고 표현하는 화가, 조각가, 무용수, 비극작가의 활동뿐만 아니라 건축, 치료, 항해 등의 기술도 가리킨다(AP, 59).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이 존재했듯이, 현재도 예술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예술은 절대적인 모습으로 몇천 년을 앉아만 있지 않다. 사회와 사유 체계의 변화와도 같이 예술은 무의식적으로, 동시에 유기적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와 함께 예술의 정의와 함께 예술이 추구하는 바 즉, 아름다움 또한 변화해 왔다. 그래서 시대별로 국가별로 그들에게 아름다움이란 각기 상이한 대상과 관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까? 아름다움에 대해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서 확실하게 정의할 순 없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추한 것―부정적인 것―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부정의 부정인 긍정이다. 따라서 가치판단의 측면에서 당연히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며, 추한 것은 배제하고자 한다. 이로써 추와 미에 대한 이항대립적인 정리를 단순히 했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혹자는 로스코의 색면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고 하더라.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중국의 어떤 화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림 속에 들어가 버렸다는 카더라도 있다.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기에 그것을 접하고 눈물을 참지 못했으며,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을까?


사람마다 각기 기호가 다르다. 누군가는 라면에 계란을 넣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순대를 고추장에 찍어먹는다. 마찬가지로 예술도 기호의 영역이다. 내가 리히터를 그림을 좋아하듯이, 내 친구는 모네를 좋아하며, 누군가는 칸딘스키를 좋아한다. 사유하는 존재이자, 미학적 존재인 현존재에게 취미판단은 어쩌면 행운이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예술적 취향이나 주관을 너그럽게 이해한다. 그러나 과거엔 올바른 예술만이 아름답다고 여겨질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렇지 못한 예술은 쓰레기 취급을 받았으며, 그러한 작품을 창조한 예술가는 나라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과거에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객관의 산물이었다. 아름다운 예술이란 정해져 있었으며, 미에 대한 자유가 지금보다 적었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대한 주관은 존재하지 않았고, 법과 같이 사회적인 범주에 속한 속성이었다. 그 시대에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주관이 아닌 객관의 속성이었다.


하지만 계몽주의 이래로 시민들은 사유를 하며, 칸트의 경구대로 감히 알려고 한다. 계몽주의라는 사건은 주체를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시민이라는 계층은 자율적 사유,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척도를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판단 속에서 찾게 된다(EA, 73). 고로 '미'란 절대적인 객관이 아니라 주관으로도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주관인가 객관인가? 아름다움이 객관이라면 이 세계에서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못한 것이 분명하게 구분될 것이며, '미'란 경험의 영역이 아닌 선험의 영역이며, 그것은 존재의 필연적인 본질일 것이다. 반면에 아름다움이 주관적 경험이라면 아름다움은 물자체와 같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이며, 동시에 현상학적 인식의 결과물일 것이다. 


과거에 정답이 정해져 있던 테크네와 같던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올바름이 있었으며, 그 올바름은 객관적인 것이었을 거다. 그러나 이제 예술의 경계는 무너졌으며,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으며, 이제 예술을 예술이라는 칭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필요한 동어반복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작품의 본질이 아니라 지각자가 느끼는 감정이자 체험이다. 그리고 그의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그의 실존 자체를 관통하는 가치관의 발현일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이란 그의 미학적 가치관과 그의 일생에 걸친 무의식적 가치관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누군가가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또한 햄릿에 대한 심원한 해석도 공허한 잡담으로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그 사람에게는 없는, 햄릿에 대한 어떤 체험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나와 “관련”되어야 하며, 나에게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는 문학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문학이 나에게 정해지지 않은 무언가를 말하게 된다(EA, 186-7).


그 무엇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보일 뿐이다. 그 무엇을 "아름답다"라고 보는 것은 특별한 양태, 다시 말해 특별한 기분을 부각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그 기분에 따라 우리는 그 어떤 친숙하고 일상적인 것을 갑자기 새롭고 달리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의 새로운 특징이나 양태들을 발견하고 보게 된다. 그러고는 예컨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 어떤 것은 우리에 의해서 재해석되며, 또 다른 어떤 것으로 보여진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이, 우리의 보는 행위가 그 어떤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지, 사물이나 사실 등 그 자체가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은 예술이 아니고, 작품은 작품이 아니다. 예술과 작품은 예술 혹은 작품에 대한 나의 해석의 산물이다. 요컨대 작품은 결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다시 말해 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되고 가치평가를 받은 것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미감 판단은 대상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못하고, 어떠한 설명도 얻어낼 수 없으며, 오로지 나와 대상이 처하고 있는 관계만을 평가한다.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나 자신에 대한 진술이며, 아름답다고 판단된 대상 앞에서의 나의 상태를 말하는 진술이다(89-265).


예술이란 그의 세계와 사유의 지평에 의해서 그 경계가 주어지며, 아름다움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예술의 경계와 아름다움이라는 영역은 주관에 속하게 된다. 미학적인 가치관은 인간의 선험적인 transzendental이 아니라 미셸 푸코의 말처럼 "역사적 아프리오리(a priori)"라는 모순적인 말로 그 형성의 기원과 계보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Reference

베르너 융, 『미학사 입문』, 장희창 역, 필로소픽, 2021. (EA)

시릴 모라나 · 에릭 우댕, 『예술철학』, 한의정 역, 미술문화, 2019. (AP)


네이버 블로그


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