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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Nov 17. 2024

Cliché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 <별이 빛나는 밤>(1889)

클리셰. 별뜻 아니며, 크게 중요한 단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면 뭔가 멋있다. 한국말로 "뻔하다", "진부하다"라는 발언을 할 수 있음에도 가끔은 이 프랑스어를 사용해서 고급지게 표현을 하고 싶더라. 왜 이 단어가 멋있게 느껴질까? 아무래도 서양권 외국어가 주는 세련됨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서양권 외국어는 세련되게 느껴질까? 언어에 대한 그러한 추상적인 세련됨이나 미학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에 가볍게 넘어가겠다.


클리셰란 너무나도 뻔한 플롯을 일컫는다. 마치 월화수목금은 출근하고 토일은 출근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클리셰란 반가운 것보단 진부한 것일 거다.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는 우리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저 "그렇구나" 혹은 "너무 일반적이라 평범하다"와 같은 반응을 유발한다. 우리가 구상화를 보고 그림이라고 판단하고 깊게 사유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재현하는 회화가 이제는 뻔한 구시대적 클리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안정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잘 읽어지는 쉬운 책을 독서하는 경향이 있으며, 1시간에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는 철학책은 읽지 않는다. 동시에 신곡과 새로운 드라마는 잘 찾아본다. 철학과 현대미술은 진입장벽이 높아서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서 사전에 많은 지식이 필요한데 반에, 음악이나 예능 같은 프로그램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우면서도 안정적으로 인식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추구한다. 9시부터 6시까지 직장이라는 곳에서 정신줄 잡고 버텨왔는데, 왜 퇴근 후에도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보면서 '공부'하고 싶겠는가. 바쁜 사회이기에 넷플릭스와 유튜브가 잘 팔리는 데에는 이유가 분명 있다. 


그래서 현대적인 예술일수록 타자가 된다. 고전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은 예술계에선 뻔하며, 구시대적인 지나간 유행이자 유물이다. 그래서 그러한 작품은 작품 시장에 큰 충격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현시대에는 충격과 기괴함을 통해 관람자에게 미(美) 보다 숭고(Sublime)을 느끼게 하는 게 자신의 예술을 각인시키는데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그래서 미(美)라는 뻔한 결말의 클리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예술은 우리에게 충격과 사색의 순간을 선사한다. 아름다움이라는 클리셰보다 추함과 기괴함이라는 새로운 플롯을 통해서 간파되지 않는 내러티브를 추구하는 것이 이 시대 예술의 존재방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술작품 앞에서 사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려운 것을 맞닥뜨려 고민하기보다 쉽고 편안하게 향유하고 싶어 한다. 세상의 삭막함과 먹고사니즘이라는 클리셰 속에서 살아가기에 사람들은 진지하고 어려운 학문적인 취미보단 가볍고 유쾌한 오락과도 같은 취미를 추구하고자 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현대 미술은 난해한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 박히게 되었으며, 현대의 예술이 어려운 것마저도 하나의 클리셰일뿐, 그것이 사유와 관조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저 이상하고 비싼 것일 뿐이다. 따라서 현대의 작품은 그저 부자들의 수집품이자 재테크 수단이며, 예술계가 그들만의 리그라는 일반인의 그러한 판단은 어쩌면 그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공부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것이다. 대학을 나와야 하기에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책상 앞에서 공부만 했으며,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공부와 끊임없는 활동들을 한다. 그리고 직장을 잡았어도 먹고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공부한다. 그런데 왜 먹고사는데 도움을 주지도 않는 예술을 굳이 공부해서 즐기고 싶겠는가. 물론 누군가에겐 그것이 하나의 큰 즐거움이자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극소수며, 찾기 힘들다. 


그래서 우린 틀에 박힌 일상 후에 편안함과 안정이라는 또 다른 틀에 박힌 클리셰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며, 누구나 그 심정을 이해한다. 인간은 감각하는 존재이기에 노력에 대한 결과를 지각하고 싶어 하며, 불안한 현존재이기에 염려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우며, 공부와 습득이라는 불안에서 자유로운 그러한 문화를 향유한다. 매너리즘과 어려움, 불안 그리고 꾸준함을 요구하는 것들을 피하는 것은 어쩌면 일상에 지친 나 자신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 우린 일상이라는 클리셰 이후에 우린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클리셰를 원하는데, 만약 지겨운 일상 후에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어려움을 맞닥뜨린다면 진정으로 위버멘쉬(Übermensch)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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