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ing well
도대체 잘한다는 게 뭐길래 우리 인간은 그것에 집착할까. 못한다와 잘한다라는 이분법 속에서 우린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를 선호할 것이다. 2500년 전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가시계와 가지계 그리고 Doxa와 Episteme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최초로 이항대립체계를 구성한 후, 사유하는 인간은 그 둘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전자─Bad 한 것─보다 후자─Good 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도구적 존재(즉자적 존재 혹은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려 말해 손 안의 존재(Zuhandensein))의 판단 기준에서 우린 당연히 그 본질에 더 충실하고, 용이한 그것을 고를 것이다. 그 사물이 작품이 아니라 도구라면 이러한 판단 기준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의 시선이 통과하는 투명한 도구존재이기 때문에.
아무튼 우리는 가치를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 좋은 물건과 나쁜 물건 등. 여기서 좋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좋다는 건 더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결과물을 효율적으로 얻는 것을 말한다. 혹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감성을 만족시키는 등 미감적인 이유로 좋은 걸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 목적의 수단으로써 좋은 것일 수 있으며, 때론 그 자체가 목적이라서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좋다는 것과 나쁘다는 것은 사물이나 인간과 같은 존재에 대한 가치평가다. 그것이 존재가 아니라 행위라는 양태에 적용할 경우에도 물론 '좋다'와 '나쁘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겠으나, 그것보단 잘한다와 못한다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잘한다는 것과 못한다는 것은 굳이 내가 여기서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어느 학문이나 기술에 대한 조예가 없어도 우린 잠시 그 세계에 발을 딛고 있으면 어느 것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치판단에 대한 인간의 습득은 본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린 암묵적으로 어떻게 해야 잘하는지 혹은 무엇을 기피해야 못하지 않는지 알기에 더 좋은 행위를 하고자 한다.
잘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공업적으로 잘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업적'이라는 단어보단 '효율적'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나 나는 잘한다는 것을 기술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으로 나눠서 볼 것이기에 후자보다 전자의 용어를 채택했다. 효율적인 것 vs 예술적인 것으로 나누자니 예술이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판단을 도출하는 것 같아서 그것을 지양하고자 이러한 선택을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술적으로 잘하는 것이다. 예술적으로 잘한다는 것은 공업적으로 잘하는 것과 반대의 성격으로 잘하는 것을 말한다. 공업적으로 잘하는 것은 점과 점 사이의 최단거리인 선분을 그리는 일이라면, 예술적으로 잘하는 것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고의 결과를 추구하는─그러니까 효율적이고, 공리적인 것이 아니지만 잘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업적으로 잘한다는 것은 마치 일을 잘하는 것과 같다. 최소한의 효율로 극한의 결과를 끌어내는 것. 시간이나 자본의 소비를 최소화해서 최대한 이윤을 남기는 것을 추구하는 사업적인 것에서 공업적으로 잘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업뿐만 아니라 공부, 운동에서도 잘한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공업적으로 잘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공부로 높은 점수를 받는 것과 효율적인 루틴으로 육체적 피로를 최소화하고 탄탄한 몸매나 기록을 세우는 것 등.
잘하는 것이 공업적인 영역에 속하는 분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건 이성으로 잘한다는 것이 판단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사업이나 투자는 수익이나 손실, 시험성적은 점수, 운동은 육상선수의 기록 등으로 잘하는지 혹은 못하는지 판단이 가능한데, 그것들은 숫자(digit)라는 양태로 결과를 도출함으로써 직관적으로 비교하고, 판단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며, 결과물만 볼 때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저 높은 수익률과 최단 기록과 같은 신기록만 추구하면 되기 때문이다.
공업적으로 잘해야 하는 영역에서 이성 외의 감성이나 정, 인연 등은 논외의 대상이며, 때론 방해요소가 된다. 점과 점을 잇는 최단거리를 잇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배제시키거나 밀어내야 할 방해요소이기 때문이다.
예술적으로 잘한다는 것은 그 경계가 굉장히 모호하고 희미하다. 그리고 그 기준이 매우 주관적이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이성적으로 납득이 불가능할 때도 많다. 누구는 위의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진정한 예술이며, 대상에 대한 묘사를 정확히 하는 것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라 주장할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빌렘 드 쿠닝이나 마크 로스코처럼 회화에서 물질성을 탈피한 화가들이 고전주의적 클리셰를 타파한 '잘' 그리는 화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예술에서 잘한다는 건 대체 뭘까? 눈에 보이는 시각적 현상을 보다 정확히 이젤 위 캔버스에 기록하는 게 과연 더 훌륭한 미술이고, 음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박으로만 연주하는 음악만이 훌륭한 음악일까? 앞에서 공업적으로 잘한다는 것을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의 선을 그리는 것에 비유했는데, 예술적으로 잘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예술적인 것은 최단거리만 추구하지 않는다. 때론 뒤로 돌아서, 혹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직진했다가 정위치로 돌아오는 등 이성적으로 간파할 수 없는 루트를 선택하여, 그 길을 만든다. 두 점 사이의 직선거리가 1cm임에도 예술가는 두 점을 잇는 선을 꼭 1cm로 할 필요는 없다. 그는 그의 기분에 따라서 2cm의 곡선으로 두 점을 이을수도 있고, 어떤 때에는 4m가 넘는 거리로 목적지를 관통할 수도 있다.
예술적으로 잘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판단이 불가능하다. 위의 쿠닝의 두 작품 중 과연 어떤 그림이 더 잘 그린 것일까? 혹은 쿠닝과 벨라스케스를 비교한다면?
현존재는 각자의 미감을 가진 미학적 존재다. 누구는 풍경화를 좋아하고, 누구는 추상화를 좋아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바흐의 음악을 좋아한다. 하지만 누가 더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지 혹은 더 나은 예술관을 가지고 있는지 무 자르듯이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그의 미학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한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회화보다 조각이 더 위대한 예술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모나리자를 테러하는 반달리스트가 아닌 이상 그의 취향은 누구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신이 행복하다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미학적 자유(Aesthetical Freedom─타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기에 Liberty보다 Freedom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그의 취미판단뿐만 아니라 그의 실존(L'Existence)에도 존중되어야 한다. 버스가 좋으면 전철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버스를 타면 되고, 화이트컬러 직업군보다 블루컬러가 좋다면 그걸 골라도 된다. 그리고 그가 원한다면 강남의 아파트보다 관악구의 빌라에서 살 수도 있어야 한다.
최근 미디어를 통해서 하나의 설문조사결과를 보았다. 서울 25개 관할구의 행복도 순위였다. 흔히들 부촌이라고 칭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산이 더 많기에 모두가 그들이 행복하다고 믿지만, 그 설문조사는 기대를 뒤집었다. 의외로 부촌은 낮은 순위에 있었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 진짜였나? 획일된 이데아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잘 사는 것은 '공업적으로' 잘 사는 게 아니라 '예술적으로' 잘 사는 것이어야 하는데, 과연 우린 예술적으로 잘 살려고 노력하는 게 맞을까. 통장잔고와 수익률, 거주지와 아파트이름으로 잘 사는 것을 판단하는 이 시대에 우린 삶을 영위하는 게 아니라 삶이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 혹은 깨달음이라는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공업적으로 잘해야 하는 업무인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