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we should go to classic?
우리는 왜 고전을 탐닉할까? 여기서 고전을 논하는 범위는 굉장히 광범위하다. 음악, 미술, 무용, 건축, 문학과 같은 예술이라는 범주에 포괄되는 행위들과 학문들이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겠는데, 이 외의 것들에서도 우린 고전의 위대함을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다. 그런데 우린 왜 고전이 위대하며, 동시에 중요한지 모르며 자랐기에 고전이란 그저 지루하고, 지나가 버린 것으로 여기기 쉽다. 나도 어릴 땐 셰익스피어를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억지로 읽고, 나름 그 당시의 사유(?)를 짜내서 분량을 채우려 고군분투했었다. 그래서 어렸을 당시에는 고전문학이 싫었다. 이거를 왜 읽게 하고, 이것을 통해서 글을 쓰라고 하는지 못마땅했었다. 왜 우린 2500년 전에 죽은 사상가의 남겨진 목소리를 들어하는지, 그리고 왜 그 목소리가 아직까지 남아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냥 싫었다. 공부하기 싫은 15살에게 문학책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종이는 하얗다는 것과 글자는 까맣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내가 인문학 작품을 찾아 읽고, 유튜브와 같은 매체에서도 그러한 주제들을 찾아서 보더라. 읽으랄 땐 그렇게 싫었는데 읽을 때가 지나니까 굉장히 재미있더라.
나는 철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에 취미가 있다. 철학은 학부와 석사과정─중퇴했지만─에서 전공했고, 미술은 그냥 좋아해서 공부하게 되었으며,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전시회 관람도 즐겨간다. 그리고 음악은 내가 기타를 치고, 밴드를 하기에 관심이 없을 수가 없다.
철학, 미술, 음악 이 세 가지는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바로 머릿속의 형상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형상은 철학적 사유일 수도, 형이상학적인 추상화일수도, 듣기 좋은 음악을 수도 있다. 철학은 글 혹은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 형상이 감각세계에 발현되며, 미술 작품은 캔버스 위 혹은 대리석에 새겨짐으로써 그 존재를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음악은 목소리나 악기를 통해서 그 형상을 발현시키며, 지극히 시간적인 예술이다. 그것은 멈춘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는 예술형식이다. 음악은 시간이 흘러야 가능한 예술형식이며, 그것은 시작점과 종점이 있어야 온전히 그것의 서사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미술, 음악뿐만 아니라 철학 또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과 음악이란 머릿속의 형상을 감각적 매개체로 드러낸 것인데, 나는 철학도 그것들과 같이 생각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주관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철학, 미술, 음악 모두 그 역사를 보면 귀결점을 찾을 수 있다. 어느 수준 혹은 경지에 이르다 보면 결국 모두가 같은 지점을 지나가게 된다. 서양철학의 경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 등이 그 예시가 될 것이며, 미술은 벨라스케스, 라파엘로 등 많은 작가들이 있을 것이며, 락(Rock)이라는 장르에 국한하여 음악 속에서 고전을 찾자면,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등 여러 뮤지션이 고전으로 분류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고전일까? 그건 우리가 선망하는 대상이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들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망의 대상을 파고들다 보면 우린 그 사람이 누구에게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체계를 세웠는지 흥미를 가지게 된다. 푸코를 예로 들면, 그의 해체적이며, 동시에 포스트 모던한 사유는 그가 혼자서 깨우친 것이 아니라 니체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또한 칸트는 흄의 작품을 보고서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 마르크스는 스스로 헤겔의 제자임을 자처했으며, 현대 철학계에서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철학자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인정했으며, 지젝의 사유를 언급할 때 이 두 철학자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현재의 체계를 세운 사람들이 그들의 사유와 예술에 영향을 받아서 현재의 시스템을 구성하고, 세계에 파급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을 섭렵하는 것은 위대함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하면서 그 학문의 역사를 다시금 살펴보는 것이다.
고전은 현대의 위대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세계를 형성했는지 알려주는 나침판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그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지도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고전을 접하는 것은 잃어버린 지나간 시간의 앨범을 들추는 것과 같다.
어느 분야에서 수준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혹은 더 이상 표현할 것이 없을 때 우린 고전을 다시금 볼 필요가 있다. 고전은 위대한 선배들의 사유지도 혹은 설계도이다. 그들이 어떻게 그들의 시스템을 형성했는지 우린 고전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그 고전을 따라가는 것은 나의 설계도를 작성하고, 나만의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다. 고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린 가끔 우리의 선배들과 다른 해석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건 나의 길을 찾은 것이다. 오히려 같은 해석으로 그들에게 끌려다니게 된다면 그건 그들이 너무 위대해서 뛰어넘을 수 없거나, 내 길이 아닌 것이다.
고전이란 그들의 비법이자 나의 설계도가 되어준다. 하지만 나는 그 설계도를 그들에게 완성시켜서는 안 된다. 우선 그들의 사유에 갇힌다는 것은 나를 사상가나 예술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앵무새나 기계로 만드는 것이다.
진정한 학자나 예술가는 고전을 "거쳐"가야 한다. 고전에 사로잡혀 자신의 형식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며, 연구가 아니라 공부다. 고전을 능가해야 나의 결과물이 후대에 고전으로 남을 것이며, 그래야 ~~전공자, ~~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온전히 내 이름 석자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과연 고전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당장의 철학계를 보면 고전이나 대가들의 고유명사를 떼고 자신의 이름과 학설로 철학을 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어 보인다. 내가 편협하게 논문을 찾아봐서 놓친 걸 수도 있긴 한데, 나는 그렇게 느낀다. 당장 어느 학교의 누구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느 학자의 철학을 전공했는지에 대한 언급부터 시작된다.
나는 고전을 극복하고 싶다. 내가 고전으로 남지 않아도 좋다. 나는 타인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앵무새가 아니라 온전한 내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