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우연성

contingence

by 오경수
잭슨 폴록_Galaxy 1947.jpg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 <Galaxy>(1947)

예술이 필연 혹은 우연의 결과인지 단언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무의식의 발견 그리고 키네틱 아트와 스핀 아트 그리고 숭고(Sublime)가 예술의 중요한 방법과 주제가 된 작금의 시대에, 미(美)라는 구시대의 필연적인 예술의 지향성을 상실한 예술가에게 아름다움이라는 공학적 기술론은 이미 지나가버린 파도와도 같다. 예술의 제재, 창작 과정이라는 우연성 그리고 구조라는 사회적 현상, 주체의 소멸 등은 예술이 더 이상 현존재의 필연적인 이상과 상상물의 결과가 아님을 폭로했다.

플라톤의 이분법 이래로 세상은 둘로 나뉘었다. 미와 추, 진실과 거짓, 위와 아래, 남성과 여성 등 전자를 후자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여기며, 아래보다 위를 추구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이데아로의 회귀를 추구하며, 현세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로 필연적으로 복귀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는 미학에도 직접적으로 드러나있다. '미'란 예술이 추구해야 하는 성질이며, 그것은 이데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우매한 인민들에게 예술은 올바름에 대한 선전 수단이어야 했으며, 그것은 지극히 필연적 교육수단이지, 우연적인 즐거움의 매개체가 아니었다.

중세에 예술은 교회의 아래에서 신을 찬양하고,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나체는 오로지 성스러움만을 추구해야 했으며, 외설과 포르노그라피를 목적으로 그것을 그려서는 안 됐다. 예술은 기술이었다. 그것은 사상적 혹은 방법론적 우연보다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필연적으로 생산되었다. 그 당시 예술은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자 이념의 집합체였다.

데미안 허스트_Circle Spin Painting 2009.jpg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1965~) - <Circle Spin Painting>(2009)

우리는 하나의 랑그(langue)를 수많은 파롤(parole)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린 어떤 파롤을 발화하느냐에 따라서 그 대화에서 에이스를 쥔 승자일 수 있고, 별 볼일 없는 패를 쥔 패자일 수 있다. 이때 우린 보다 상황에 맞는 어휘와 어조로 나의 뜻을 전달하고 내가 원하는 대화를 이끌어냄을 올바른 선택지라고 할 것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머릿속의 형상을 캔버스 위에 남김을 함의한다. 따라서 '맞게' 그린 그림이란 추상적 형상과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타당하게 합치하는 것일 거다. 즉, 이상과 현상의 일치가 플라톤 이래로 우리가 말하는 '올바름'이다.

하지만 니체라는 철학적 메시아가 『도덕의 계보』라는 망치로 2000년 넘게 지속되던 서양철학의 근간을 내리침과 동시에 현존재는 무엇이 올바름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학문, 종교, 사회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파장이 이르렀다.

칼더.jpg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1898-1976) - <The Red Crescent>(1969)

예술은 꼭 형상과 결과물의 일치만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만이 올바른 작품일까? 우연성이 배제된 '항상성'만이 예술가가 추구해야 할 덕목이며, 현세보다 저 너머의 세계가 과연 더 참된 것일까? 악마의 환영으로부터 벗어나려 한 데카르트의 회의처럼 모든 역사적 결과물은 의심의 대상이 되며, 그 단단한 구조는 흐르는 유체였음이 폭로되었다. 예술의 우연성. 그것은 주체의 해체와 동시에 예술가를 다른 지위에 놓는다.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서 예술가는 머릿속 생각을 통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근원에서 그저 퍼올린 것일 뿐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예술가의 주체성을 해체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르면 예술가는 영매(통로)와 같은 존재이며, 그 영감은 자신의 것이 아닌 알 수 없는 근원의 것이다(오경수, 2025, 191).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 <자전거 바퀴>(1917)

예술가가 자신의 형상을 그리지 않음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리는 바넷 뉴먼, 아담의 언어로 말을 거는 로스코 등은 그 제재가 예술가 밖의 알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 샘솟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방증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우연성이라는 것은 예술가의 주체성을 해체하는 데에만 언급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더 이상 물감은 화가의 손이 될 필요가 없었고, 작품은 그저 가만히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대표적으로 잭슨 폴록, 알렉산더 칼더, 데미안 허스트, 마르셀 뒤샹 등 많은 작가들이 예시로 들 수 있다.

잭슨 폴록은 드리핑 기법을 통해서 회화의 형상을 오로지 중력과 엔트로피라는 우연성에 맡겼다. 따라서 그는 작품을 그릴 때 형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물감을 캔버스 위에 뿌렸을 뿐이다. 오로지 우연성으로 작품을 만드는 그는 예술가의 주체성과 목적성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추상성과 우연성 만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 또한 혁신적이었다. 우선 기존의 키네틱 아트와는 다르게 일정한 규칙이 있는 운동이 아닌 불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예술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뒤샹의 <자전거 바퀴>는 물론 정해진 시간에 바퀴가 돌아가는 그런 작품은 아니지만, 그 바퀴를 돌렸을 때, 그 운동은 예측가능하다. 이 운동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굉장히 정형적인 그래프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칼더의 작품은 그렇지 않다. 칼더의 작품은 그래프가 불규칙적이고,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가벼운 바람에도 움직이는 작품이다. 따라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 그러한 예술작품이다. 원래 키네틱 아트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묘미인데, 칼더는 모빌을 만들 때 가벼운 소재를 사용해서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작품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오경수, 2024, 183).

데미안 허스트는 상어나 나비의 사체로 작품을 만듦으로 유명한데, 이 사람 또한 작품에 우연성을 담아서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예술을 추구한다. 그의 스핀 아트는 원판을 활용하여 중심축을 기준으로 물감들을 빠르게 회전시켜서 우연한 효과를 낸 예술이다. 작품이 관객에게 회화의 전통적인 경계를 다시 사유하고 예술적 창작에서 우연과 예측 불가능성의 역할을 인식하도록 도전한다는 평가도 있다.

Spin Paintings는 프로세스 기반 예술, 운동성, 기술과 창의성의 교차점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Hirst가 기계 장치를 사용하는 것은 예술적 실천의 경계를 넓히고 통제와 자발성의 개념을 활용하려는 그의 관심을 강조합니다. Spin Paintings는 Hirst 작품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으며, 역동적이고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구성을 통해 생각을 자극하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능력을 보여줍니다(Selena, 2024).


잭슨 폴록과 알렉산더 칼더가 예술사에 한 획은 그은 이유는 예술에 우연성과 운동성을 도입했기 때문이며, 데미안 허스트의 경우는 원판이라는 기계 장치를 사용하여 예술의 실천적 범위와 도구의 확장을 이뤄냈으며, 동시에 그 확장성과 우연성의 결합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예술이라는 간파할 수 없는 무언가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든 이 우연성은 예술에 네겐트로피가 아닌 엔트로피를 선사했으며, 예술과 운동성의 경계를 우연성이라는 언어로 무너뜨렸다.


Reference

오경수,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퍼플, 2024.

____, 『형이상학적 시선─보이지 않는 침묵과 형상 사이』, 퍼플, 2025.

Selena Mattei , 「Damien Hirst: 예술적 혁신과 개념적 걸작」, https://www.artmajeur.com/ko/magazine/8-mannago-balgyeonhaseyo/damien-hirst-yesuljeog-hyeogsingwa-gaenyeomjeog-geoljag/335662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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