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n essence. But
본질은 볼 수 없다. 볼 수 있다면 그건 본질이 아니라 그것의 양태일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이미 우리가 정신이라는 본질을 물질적으로 느낄 수 없음을 논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감각적으로 지각된다면 그건 정신이 아니라 신체이며, 대자적 본질이 아니라 즉자적인 물질일 것이다. 바라보고 싶지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본질이자, 추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추상화는 우리에게 우리의 언어로 말을 걸지 않는다. 아담의 언어를 잃고 바벨의 언어로 소통하는 타락한 현존재에게 그의 속삭임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식과 예술을 탐하는 현존재는 그 눈먼 장님처럼 그 속삭임을 더듬더듬 찾고, 그것에 귀 기울이려 한다. 하지만 예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본질은 현존재라는 우리가 순결을 잃은 이상 더는 보거나 들을 수 없는 허상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예술가들은 회화로 진리를 담으려 했다. 그러한 목적에 의해서 기존의 회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작품이 형성되었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작품은 구상과 형상보단 추상의 형태로 그려졌으며, 그림에서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언어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게 물질성을 탈피한 추상회화가 탄생한다.
하지만 물질성이 사라지자 회화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있으나 알 수 있는 것은 없어졌다. 구상이 아닌 추상이 된 회화는 어떤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기보다 그저 원색들의 향연이자 화가의 액션의 흔적만이 남게 되었다.
이데아, 본질, 형상, 아름다움 등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대상들은 온전히 그 자체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들은 세속적이며, 즉물적인 대상들을 매개로 우리에게 자신의 일부를 보여줄 뿐, 우리에게 자신의 온전한 나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항상 베일을 덮고 자신의 모습을 감춘 여인처럼 그저 실루엣이라는 착각만 우리에게 감기고 홀연히 사라지며, 우리를 유혹한다.
물질성 혹은 즉물적임이 그 진리를 가리는 대지(Erde)를 지움으로써 진리라는 세계(Welt)에 도달하고자 한 예술가들은 회화에 알아볼 수 없는 본질만 남기고,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은 모두 지워버렸다.
그 결과 회화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 아름다움, 물질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알아볼 수 없는 것, 숭고, 추상성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마크 로스코나 잭슨 폴록과 같은 현대 미술작가─더 나아가서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현대 미술은 작품 내의 미적 정보와 의미 정보가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조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오경수, 2024, 30).
현대의 작품은 부재의 작품으로, 실재적인 내용들을 도외시하고, 빈자리들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그 무엇을 표현한다. 예술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융, 2021, 300). 하지만 몬드리안은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 그는 물질성을 지움으로써 부정의 부정성을 논하는 게 아니라, 본질 그 자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몬드리안의 이러한 호기로운 계획은 마치 송과선을 찾아서 정신과 육체의 교점을 설명하려는 데카르트의 모습을 오버랩시킨다. 본질이라는 아담의 언어를 바벨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걸까? 아니면 아담의 언어 그 자체를 현존재에게 전달함으로써 본질을 증명하려고? 우리가 감각적으로 바라본 본질이 동굴의 그림자가 아니라는 보장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예술작품 그 자체가 감각적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물질성에 의해 희석된 본질이란 결국 즉물적인 대상을 매개로 나타난 환상 혹은 그저 일부일 뿐.
베르너 융, 『미학사 입문』, 장희창 역, 필로소픽, 2021.
오경수,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퍼플, 2024.